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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논쟁의 현주소

하응백 (문학평론가)

 

1.한국의 근대 문학, 특히 문학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논하는  문학론 혹은 비평은 논쟁을 통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20년대에는 새롭게 등장한 계급 문학에 대한 논쟁, 이후 KAPF문학의 방향성에 대한 김기진과 박영희의 '내용과 형식 논쟁', '농민 문학 논쟁', '문학 대중화 논쟁', 김남천과 임화 사이에 벌어진 '정치· 문학 일원론과 이원론 논쟁' 등이 식민지 시대 문학론을 이끌었고, 그 논쟁들이 결과적으로 한국 문학론의 근대성을 이론적으로 확립했다.
해방 이후 좌파와 우파 또는 좌파 사이에서 진행된 민족주의 문학 논쟁은 당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과제였던,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민족의 장래 문제와 문학 논쟁은 첨예하게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의 순수·참여 논쟁, 1970년대의 리얼리즘 논쟁, 1980년대의 민족·민중문학논쟁 역시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에 대한 문학인들의 심각한 고민의 반영이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를 지나면서 제기된 몇 가지 논쟁은 변증법적 고양이라는 논쟁의 본래적 역할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저널리즘에 부하뇌동하거나 상업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2000년에 접어들면서 논쟁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전혀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고 있다. 이 글은 2000년에 벌어졌던 문학 논쟁의 추이를  살펴보면서 그 특징을 점검해 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지만, 지면의 특성상 내용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생략하고,  논쟁
의 추이를 살펴보는 데 주력한다.

2. 2000년 4월28일 원주의 '토지 문화관'에서 열린 '김현 10주기 세미나'에서  평론가 권성우는 '4·19 세대 비평의 성과와 한계―비평적 인정  투쟁의 논리를 중심으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의 논지는 4·19세대 비평가인 김현, 백낙청, 김주연, 김치수 등의 비평적 성과는 인정하지만, 그들의 비평은 선배 세대에 대한 문학적 인정 투쟁의 요소가 강했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는 발표회장에서 즉각적인 반론을 야기시켰다. 토론자나 질문자들은  투쟁이라는 전투적 용어의 사용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김현 비평의 고유성  환기에까지 다양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 시대의 논객 이어령이 약관의 나이에 선배 세대를 치고 나왔고, 새로운 문학론의 전개가 대개는 기성의 정설(定說)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권성우의 주장도 경청할 요소가 있다. 반론을  제기한 쪽 입장에서 본다면, 권성우의 발제가  김현 비평을 제대로 평가했는가 하는 의문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늘 토론에서는 어떤 특정 용어가 서로 다른 식으로 해석되어 논쟁이 격해지는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세미나에서도 권성우의 '인정 투쟁'이라는 용어가 그러한 작용을 했다. 이 용어는 '전통의 부정과 발전적 계승'으로도, 문학판의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권력 투쟁'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소 과열된 감이 없지 않지만 여기까지의 논의의 과정은 그다지 상식을 벗어 났
다고까지 볼 수는 없다.
세미나 이후 5월 18일 발행된 계간 <문학과 사회>에는 이 세미나와 관련하여 문학평론가
김태환의 ‘김현 10주기 기념 문학 심포지엄을 다녀와서(참관기)’를 비롯한 발제 논문들이 실렸다.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이는 발제자였던 권성우였다. 당시 신문 보도를  인용해 본다.
(....중략....)그러나 권성우씨는‘문사’내용 중  김태환씨의 ‘김현  10주기 기념 문학 심포지엄을 다녀와서(참관기)’ 그리고 권오룡씨의  ‘쟁점―권력형 글쓰기에 대하여’ 등 2편의 글을 문제 삼았다. 그는 ‘문지’ 홈페이지의 자유 게시판 5월21일자에 본인의 주장을 게재했다. “김태환씨의 참관기는 저(권성우)의  발제문과 토론과정에 대한 상당히 편향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으며, “권오룡씨의 글은 (…) 저나 강준만, 김정란, 이명원 등의 비평가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진다”는 것이었다.
당시 세미나에서 권성우씨는 ‘4·19 세대 비평의 성과와 한계―비평적 인정 투쟁의 논리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했으며, 이에 대해 김철, 홍용희, 권오룡, 황현산, 이인성, 하응백씨 등이 나서서 열띤 논쟁이  있었다고 김태환씨는 전했다. 권성우씨의 논지는 ‘김현·김주연·김치수· 백낙청 등 4·19세대 비평가들이 자기 세대의 비평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요량으로 50년대를  깎아내리고 60년대를 적극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라고 김태환씨는 요약했다.
이에 대해 게시판 게재문에서 권성우씨는 당시 “질문자들의 비난조의 어투”가 김씨 글의 중요한 콘텍스트로 기능하고 있다면서,  “참관기가 너무나 축약돼 있어, 제가 답변 과정에서 개진한 논리들이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권성우씨는 '인정투쟁’이란 개념이 4·19세대 비평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한 측면을 조명해 본  것이라는 답변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성우씨는 김태환 권오룡 두 사람의 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도록 ‘문사’에 200자 원고지 70~80장 정도의 투고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22일 ‘문사’ 동인들은 이를 즉각 거부했다. “참관기는 논쟁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니며”, “어떤 참관기도 어느 정도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였다. 또 ‘문사’ 동인들은  권오룡씨의 글도 “권력 문제를  다룬 비평 담론들의 일반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있을 뿐, 몇 사람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자 권성우씨는 ‘문사’의 답변에 대한 원고지 30장 분량의 재답변과  함께 “다른 지면을 통해 본격 반론을 펴겠다”고  말했다. 5월23일부터는 진중권씨가 걸쭉한 입담과 함께 권오룡씨를 공격하며 뛰어들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도 권오룡씨 등 문사 동인들을 비난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 논쟁은  진행중이다. (조선일보 2000년 5월 19일, 김광일기자)
이렇게 하여 논쟁은 제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권성우가  문제 삼았던 권오룡의 글은 "권력이라는 이름의 그 거울은 백설공주 계모의 거울처럼 권력의 욕망을 끝없이 증식시키기만 할뿐이다"에서 보이는 것처럼,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문학 권력 일반론이었지만, 시기적으로
묘한 시점이어서, 권성우는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짜 문제는 논쟁의 2라운드가 '문지' 인터넷 게시판으로  옮겨가면서 이상하게 확대, 변질
되면서부터이다. 게시판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긴 하지만, 당시  게시판에는 빈정거림이나 욕설에 가까운 익명의 글들이 오르기 시작했고, 문학  논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진중권과 같은 논객이 정의의 기사도를 불태우며 설전을 시작했다. '문사' 동인이 권성우의 글을 게재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인데, 여기에는 각각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문학과 사회>는 동인지이므로 동인의 의견에 반하면 원고를 게재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있고, 반면 권성우에게 반박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너그럽지 못한 처사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게시판의 설전은 곧  '문학과 지성사' 혹은 ' 문학과 사회' 동인의  권력론으로 옮겨갔다. 그 핵심은 "너희들이  바로 한국 문학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권력  집단 아니냐"하는 것이었다. 이  논의에 그 동안 '문지' 진영을 공격했던 여러 논객들이 참여해 저마다의 논리를 폈다.   그 와중에 논쟁은 게시판에 한 시인의 성폭행 고발성 글이 올라오면서 전혀 엉뚱하고 비상식적 방향으로 흘렀고, 급기야 '문지' 게시판은  문을 닫고 말았다. 게시판이 문을  닫고서도 이른바 '권력론'은 창작과 비평사 홈페이지 게시판을 비롯 여러 인터넷 게시판에 '퍼옴'의 형태로 전파되거나 재창출되었다.(이후 게시판은 다시 문을 열었다)  논쟁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권성우는  2000년 <문예중앙> 가을호에 자신의 심정을  밝힌
일종의 변론이자 반박문을 실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4·19세대  비평에 대한 재조명이어야 했지만,  결국 인터넷으로 논쟁이 전이되면서 '문지'의 권력 논쟁으로, 다음은 치졸한 인신공격으로 급전직하되어, 정작 진지한 논쟁은 꼬리를 감추고, 풍문과 야유의 잔치가 되어 버렸다.  
 
3. 권성우의 발제문에서 시작된 논쟁과는 별도로 조선일보사 주관의 동인문학상 심사  방식을 둘러싼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작가 황석영은 지난 7월  20일 한겨레 신문 특별 기고를 통해 <동인문학상 후보작을 거부한다>는 글을 실었다.
나는 7월14일자 <조선일보>를 우연히 보고서야 내가 지난 5월에 13년 만에  간행한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이 동인문학상의 심사대상에 올라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중략....) 그러나 군사 파시즘과의 결탁으로 성장한  <조선일보>는 침묵과 수혜의 원죄의식으로 동참하게 된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그로서 막강한  언론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시대에 사회의  기초 공리는 억압에 의하여 말살되거나 부인되었으며 그 반대의 가설이 산더미처럼 재생산되었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 언론이 우리의 역사발전을  위해서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 당위일 것이다. (....중략....)다시 내게 관련된 동인문학상의  심사경위로 돌아가자면, <조선일보>는 몇몇 작가 평론가들을 `종신 심사위원'으로 선정해서 `공개적'으로 심사한다고 한다. 심사위원들  면면을 살펴보니 문단에 나온 지 38년이 되는 내게는 선배보다는 후배가 더 많았다. 심사의 대상이 된 후보자들도 수십년 차이가 나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중략....) 죽을 때까지 심사를  한다면 그 위원들과 <조선일보>는 앞으로도 수십년간 불변할 것인지. 앞으로 수십년 동안 수많은 미래의 심사 대상자를 동시에 관리하려는  것인지. 전망이 안 보이는 자들은 역사는 과거에서 지금까지 불변할  것이라고 믿겠지만, 하늘 아래서 역사와 사람의 가장 큰 특성은 변화에 있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는 보고 있다.
문학상의 상업주의와 사이비 권력놀음 따위의 문제점이 지적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실상은 <조선일보>가  특정 문인 몇  사람을 동원하여 한국문단에
줄 세우기 식의 힘을 `종신토록'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같은 잣대 위에 올려놓고, 공개된 신문지상에서, 불공평하게도 의견을 내놓은 자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은 채,  내용과 별 상관도 없는 말 몇 마디로 `탈락'이니  `잔류'니 하고 치워 버리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부여한 권리인가? 무슨 경품 뽑기 대회도 아니고 불량품 가려내기도 아닐진대, 편가르기와 줄 세우기 식의 사이비 권력 놀음을 당장 걷어 치워라. 심사에 동참한 동료 문인들에게도 엄중히 항의하건대,  나는 변변치는 않지만 떳떳하게 살 권리가 있는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욕을 보이지 말아 주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문학상이 세계관의 한 표현일진대 나는 <조선일보>측의  `동인문학상'뿐만 아니라 현대문학에서의  동인의 위치에 대하여도  이견이 있는 사람이며, 따라서 귀측의 심사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일단 밝혀두려고 한다. (7월 20일 한겨레신문)  이 기고문을 통해 본 황석영의 동인문학상 심사 거부에 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수구 세력을 대변하는 <조선일보>가 주는 상이라는 것, 또 하나는 심사 절차로 종신 심사위원들이(후배들도 있는데) 잔류니 탈락이니  해서, 권위적으로 상을  운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결과적으로 편가르기이며 줄 세우기라는 말이다.
문학상이 문학 자체는 아니지만 문학을 있게 하는 한 환경임에 틀림없다면, 사실 문학상에 대한 논의는 문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상을 주는 측의 입장이 문학 너머 정치적, 상업적 이익에 전적으로 목적을 두고 있다면, 이를 거부하는 것은 문인으로서의 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조선일보가 영향력 확대나 줄 세우기를 위해서 동인문학상 운영을 바꾸었다고 보는 것에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 오히려 황석영의 태도는 "너는 나쁜 놈이니 네가 하는 모든 일은 나쁘다"식의 흑백 논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는 특유의 기질 상 심사 위원의 일부가  자신의 문단 후배이고, 또 후배들의 작품과 같이 경합을 벌인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 황석영의 기고문은 기실 바람직하게 논의가 전개되려면 문학상 심사 절차에 대한 토론이나, 후보 작품 선정에 대한 공정성, 나아가 수상 작품의 가치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문학 안에서의 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고문은 또 다시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조선일보> 대 반(反)조선일보 진영과의  싸움으로, 정확히는 반조선일보 진영의 조선일보 공격의 호재(好材)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 안티조선 운동에 앞장 선 강준만은 <한겨레 21>(7월 25일)에서 "황석영씨에게 뜨거운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그의 결정은 정말 쉽지 않은 것이었다. 작가로서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그런 용단이었다.  이거야말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나는 우리 시대에 황석영이라는 작가를 갖게 된 걸 큰 기쁨이자 영광으로 생각한다"면서, 더욱 나아가 "내 답은 <한겨레>를 키우자는 것이다. 꼭 <한겨레>가 아니라도 좋다. ‘다양성’을 위해 이른바 ‘빅3’를 제외한 신문들을 키우자"의 주장까지 전개한다. 같은 지면(<한겨레 21>)에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이자 <조선일보>와 가까운 인사로 알려진 이문열의 인터뷰도 실렸다.  이 인터뷰는 처음에는 동인문학상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곧 <조선일보>에 대한 이야기로 돌입한다.
―탈락과 잔류를 공개하는 등 바뀐 동인문학상의 심사 방식이 비문학적이라는 지적이 있다.(기자)=추천한 사람이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면서 탈락 의견을 내고 다른 심사위원이 반대하지 않으면 탈락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이 작가 본인들에게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므로 탈락을 공개하지 말고 후보작을 계속 늘려가면서 내부적으로 수상작을 압축해가는 방식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문열)
―황씨가 심사대상 되기를 거부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심사 방식에 대한 지적도 있었지만, 그는 <조선일보>가 “어려운  시기에는 냉전적 공격과 터무니없는 폭로로 ‘권력’을 누리고” 이제는 문화면에서 다양성을 보여줌으로써  “또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가.(기자)
(.....중략....)
―최장집 교수에 대한 사상 검증 등에서 드러났던 <조선일보>의 극우적  논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기자)
(....중략....)
<한겨레 21> 7월 25일에서 부분 인용. (괄호 속의 '기자', '이문열'은 인용자) 강준만의 글이나 <한겨레 21> 기자의 이 인터뷰를 보면, 황석영의 동인문학상  논의를, 동
인문학상 대 반(反)동인문학상, 조선일보 대  반조선일보, 보수 대 진보로  확대 심화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이들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해서  8월 7일 ‘조선일보에 기고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지식인 선언식’을 가졌다. 총 154명이 참여했고, 이중 30명이 문인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조선일보는 황석영의 작품을 포함, 동인문학상 심사를 계속했고, 황석영이 지적한 '잔류', 탈락' 등의 비문학적 용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8월 10일자) 이후 몇몇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으로 황석영  동인문학상 논쟁은 옮겨갔고,  8월 31일자  <한겨레 21>은 "토론을 거부하는 한국사회 논쟁을 즐겨라"을 특집으로 마련하기도  한다. 결국 동인문학상 최종 후보작은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엄창석의 '황금색 발톱’, 이인성의 ‘강어귀에 섬 하나’, 서정인의 ‘용병대장’으로 압축되었고, 최종적으로 10월 6일 투표에 의해 이문구의 작품이 동인문학상으로 선정되었다.  이문구의 작품이 선정되자 안티조선 측 일부 네티즌들은 혼란을 일으켰던 것 같다. 왜냐하
면 이문구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며, '민족문학작가회의'라면 당연히  진보이며, 진보는 안티조선인데, 진보인 이문구가 조선일보에서 주는 상을 받다니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다음의 글은 이를 말해 준다.
이문구씨는 동인문학상을 거부해야...  
글쓴이:유자소전(10월 7일)
소설가 이문구씨의 작품이 '동인문학상'에 선정되었다. 어느 문학상에 선정되었
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조선일보 주최라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가 우리 사회의 어떤 존재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최근  동인문학상을 둘러싸고 황석영씨의 거부선언이나, 1,2차에 걸친 조선일보 기고 및  인터뷰 거부 지식인선언 등을 볼 때 이제 조선일보의 선택은 개인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문구씨의 동인문학상 수락은 우리 사회의 조선일보 문제에 대해 수용과 인정을 넘어 조선일보의 문제를 은폐  엄호하는데 악용될 뿐이다. 이문구씨의 동인문학상 수상은 일제하 총독부 주관하의 조선미술전 같은 것에서 입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럴 경우 상을 받을 것인가?  다시한번 이문구씨에게 소설속의 진실한 삶이 아닌 우리사회에서의 '진실한 삶'의 전범을 보여주시길 기대한다.(www.jabo.co.kr 게시판에서) 좀더 치밀하고 분석적인 글(?)도 있다.
글쓴이:팔대산인 (10월 14일)
[비망록2] 동인문학상 수상에 관한 비화-안티조선의 자장력 (...중략...)조선일보로서는 이번 동인문학상 수상작의 선정을 놓고 다각도로 이해득실을 따졌다. 스폰서로서 상품효과의  극대화를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인성의 탈락은 바로 그의 작품세계에도 드러나듯이 문학을 '현실과의  가장 치열한 싸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가 너무 위험했던 것이다. (...중략...)
이인성 카드가 사라지자 그 대안으로 나선 것이 바로 이문구였던 것이다. '나는 너무...'라는 작품은 조선일보 문화면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이동진과 박광수, 그리고 스포츠조선까지 우려먹어야 하는 동인문학상의 상금 5천만원을  생각해보면 그리 수지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딱하나, 민족문학작가회의라는, 어찌보면 조선일보와 궁합이 안맞는 사람들을 포용한다는 것,  바로 이점 때문에 이문구는 '간택'이 된 것이다. 결국 동인문학상 또한 문학 본래의 취지와 달리 안티조선의 자장속에 움직였던 것이다. (.....중략....) (
www.jabo.co.kr)

황석영의 문제 제기는 동인문학상 운영의 미숙성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정당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문제 제기는 한국의 문학상 수상 제도, 혹은 문학상 심사 대상작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로 나아갔어야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런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발빠른 진영의 발빠른 매체(저널과 인터넷)에 의해 논의는 진흙탕 속으로 흘러가 버렸다. 때문에 정당한 비평적 개입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어떤 식의 문학적 논의도 의도하지 않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죽어가는 문학을 살리자는 대의명분에서, 특정 언론의 문단 장악 기도를 반대한다 하면서, 결국 문학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상업주의의 또 다른 변신이랄 수도 있고, 일부 문인의 대중  선전 전략일 수도 있다. 전후 맥락을 짐작하지 못하는 일부 열정적 네티즌들을 홍위병으로 만들고, 이들은 그것이 마치 정의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 권성우와 황석영으로 촉발된 2000년 한국문학논쟁,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은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다가 결국은 진흙탕 속으로 사라져  버린 형국이 되었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혹시 문학론을 잃고  불신과 풍문과 소문과 의심만을 얻은 것은  아닌가. 4·19세대 비평에 대해 보다 더 심도있게 보자는  권성우의 애당초 취지와 문학상 심사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황석영의 논지는 온데  간데 없고 결국은 풍문과 유언비어와  같은 잡설이 횡횡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문학을 문학 자체로 보지 않고 다른 쪽으로 끌고 가 자신의 허욕을 충족시키거나, 아니면 양명(揚名)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비문학적 태도에서  기인한다. 1920년대 박영희가 논쟁  끝에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고  잃은 것은 문학"이라고 했지만, 만약 문학 논쟁의 전개가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이 될 지
도 모른다.
이런 예에서 보듯, 2000년대의 문학 논쟁은 상업주의의 촉수에 늘 놓여 있으며, 저널리즘과 저널리즘에 편승한 세력에 이용당하기 십상이며, 또 새롭게 등장한 인터넷이라는 매체에 여지없이 흔들리는 속성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욕망의 무한 질주에 문학 논쟁이 바퀴살이 되어 따라 돌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바로 이것이 2000년 한국문학 논쟁의 현주소다. 논쟁도 아닌 논쟁의 바퀴가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