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지킴이  /  명장 정춘모

갓의 명장(名匠) 정춘모 선생의 외길 인생

김기형 (덕성여대 교수)

 

장인의 무수한 손길을 거쳐 완성된 통영갓

옛말에 “갓 쓰고 망신”이라거나 “갓 쓰고 자전거 탄다”는 말이 있다. 본래 갓은 햇빛을 가리려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출발하였지만, 후대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갓은 신분과 체면을 나타내 주는 사회적 징표로서의 상징성을 더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그러니 갓을 쓰고 당한 망신은 더 무참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시점에 있어서 갓은 전통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갓을 쓰고 자전거를 타는 일은 전통과 근대의 부조화를 뜻하는 것이니, 어울리지 않아 어색한 상황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시대적 효용성이 다하여 알아 주는 이가 별로 없는 갓을 만든다는 것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9월 18일 오전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정춘모 선생 작업실을 찾았다. 평생을 갓 만드는 일에 전념하였다는 사실 자체에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이것저것 여쭈어 보았는데, 정춘모 선생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과 갓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겪는 어려움 내지는 고뇌를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다.

스무살 무렵 갓 배우는 일과 인연을 맺어  

정춘모 선생은 1940년 경북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갓은 여전히 쓸모있는 의관이었으며, 그래서 갓을 만드는 곳이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정 선생이 태어난 예천에도 갓 만드는 곳이 있었는데, 당시 예천에는 입자장만 있었다. 입자장이란 총모자와 양태를 결합하여 갓을 완성하는 조립작업을 말하는데, 인두로 다리고 옷칠을 하는 일이 주 업무이다. 선생은 예천에 있을 때 이미 갓 조립하는 일을 배운 적이 있다. 그렇지만 선생이 본격적으로 갓 배우는 일과 인연을 맺어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계기는 스무 살 무렵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하숙을 할 때이다. 선생은 대구에 일정한 토지를 소유한 상황에서 농장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하숙하던 집이 바로 명장(名匠) 고재구, 전덕기 옹을 비롯한 통영의 입자(笠子) 장인들이 총집결하여 갓을 만드는 집이었던 것이다. 주변에 갓 장인들이 있다보니, 자연스레 잔심부름도 하게 되면서 갓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갓 장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때 그가 배운 것은 갓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치던 이른바 ‘통영갓'이다. 여기서 잠깐 통영갓의 역사에 대해 얘기해 두는 것이 좋겠다. 통영갓은 조선조 중엽(1593년) 지금의 해군본부격인 삼도수군 통제영이 두룡포(頭龍浦, 지금의 통영시 일대)에 설치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해 400여 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공방의 기원은 초대 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통영 앞바다의 한산도 영내에 공고(工庫)를 설치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후 1604년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이를 통영 시내로 옮겨 영내에 13공방을 두고 관급(官給)으로 기능공을 양성하여 군수품과 영민(營民)의 생활용품 그리고 대궐진상품 등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렇게 내려오다가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1900년) 통제영이 폐쇄되면서 공방도 훼철되어 더 이상 생산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는데 입자방, 소목방, 상하칠방, 주석방 등 4가지 기능만은 민간 전승으로 명맥을 유지하다 1964년에 이르러 중요무형문화재 4호로 지정되어 제도적 장치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때 입자장에 전덕기, 총모자장에 고재구, 양태장에 모만환 옹이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한 몸 바쳐 지켜내…  

정춘모 선생이 처음 갓 만드는 일과 인연을 맺은 시기가 1960년초니까 아직 인간문화재 제도는 생겨나지 않은 때이다. 갓 만드는 일이 사회적으로 존중을 받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존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갓 장인은 손재주꾼으로 천시받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의례를 중시하는 전통사회에서는 갓이 신분과 체면의 상징으로 나들이나 손님맞이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의관(衣冠)이었지만, 시대가 바뀌어 일상생활의 복장이 한복에서 양복으로 대체되면서 갓은 그 실용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이 갓 만드는 일에 빠져 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하숙집에서 갓의 명인들을 만난 것이 갓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고는 하나, 이는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다. 선생은 이에 대해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하긴 우리네 인생살이에서 운명처럼 겪게 되는 일에 대해 당시 왜 어떤 이유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 모든 것을 풀어서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선생이 아무 이유 없이 갓 만드는 일에 뛰어들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희소성에 대한 애착'과 더불어 한 세상 사는 인생인데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남겨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존재론적인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갓 만드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일이어서 누군가 하지 않으면 전승이 끊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의 일부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몸 바쳐서 갓을 지켜낸다면 그것은 곧 이 세상에 자신의 족적을 남기는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러 선생은 갓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자 단단히 결심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초 전덕기 옹이 세상을 떠나자 김봉주 옹이 입자장을 잇게 되는데,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스승 김봉주(입자장), 고재구(총모자장), 모만환((양태장) 등은 시골에서조차 갓이 사라지게 되자 다시 통영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자 정춘모 선생 또한 이들 스승을 따라 통영으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갓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되며 1974년 전수장학생이 된다. 여기서 선생은 1977년 스승 김봉주 옹이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입자(笠子) 기능을 새로이 전수받았으며, 모자 만드는 기술은 1978년 84세로 세상을 떠난 소문도(蘇文道) 옹으로부터 배웠다.

본래 갓은 입자장, 총모자, 양태장,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동안 통영갓은 세 사람이 각각의 부분을 따로 만들어 온 것이며, 인간문화재가 세 분야로 나뉘어 지정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게 되자 통영갓의 전승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다행스럽게 정춘모 선생이 세가지 기술을 모두 익혀 혼자서도 통영갓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여 통영갓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갓 만드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섬세한 감각을 요구한다. 이것을 선생은 “사람 손의 한계”라고 설명하는데, 20여년간에 걸친 수련 끝에 정춘모 선생은 스승이 모두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통영갓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남게 된 것이다.  

양태만들기 24과정, 총모자 만들기 17과정, 갓모으기 10과정 등 모두 51개 과정

갓은 세가지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 우선 말총으로 총모자를 엮고 머리칼 같이 가느다란 대(竹絲)로 양태를 엮는다. 마지막으로 좥갓 모으기좦는 이 두가지를 결합하여 잇는 작업으로 다시 좥양각짓기좦, 좥수장하기좦, 좥버럼일좦 등 세 과정을 거친다. 전체적으로는 양태만들기 24과정, 총모자 만들기 17과정, 갓모으기 10과정 등 모두 51개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갓이 완성된다. 갓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공이 많이 드는 일은 무엇이냐고 하자,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일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태만들기가 가장 힘들고 공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경남 하동지방 특산인 분죽(粉竹)을 가늘디 가는 죽사(竹絲)로 풀어낸 다음 이를 엮어나가는데, 양태의 올(세로)이 될 ‘살대'는 조금 굵은 편이고 날(가로)이 될 ‘절대'와 엇비슷이 돌아가는 ‘빗대'는 가장 가는 것을 쓴다. 양태 하나엔 가늘디 가는 ‘절대'와 ‘빗대'가 약 360여 개 들어가고, ‘날대'는 100여 개가 소요된다. 특히 ‘절대'와 ‘날대' 사이로 비스듬히 끼워넣는 ‘빗대넣기'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갓 만드는 일 가운데서도 가장 섬세한 장인적 역량이 요구된다.

판판한 양태를 인두로 휘는 ‘버럼일' 또한 장인의 세기(細技)가 요구되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인두가 너무 달면 대가 타서 꺾어지고 달지 않으면 아예 휘지를 않아 적정한 상태를 맞추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갓을 완성해내는 장인의 기술은 그 자체가 신기(神技)이다.
“갓 중에도 특수한 갓이 있어요. 양반들이 쓰는 그런 걸 보면 이걸 손으로 했는지 신이 했는지 그런 것도 있죠. 공이 원체 많이 드니까. 일종의 사치면서도 예의와 만물의 영장이라카는 인간의 존엄성을, 거기다 갓에 대해, 우리 조상들이 총매진을 갓에 했더라고. 옷은 떨어진 걸 입어도 갓은 떨어진 걸 안쓰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하긴 신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머리에 쓰는 것이 갓 아닌가. 이렇게 고도의 장인정신이 필요한 갓 만드는 기술을 모두 익힌 정춘모 선생은 1984년 통영에서 서울로 활동 공간을 옮기게 된다.

“왜 통영에서 계속 활동하시지 않고 서울로 오시게 되었나요?”
“정부 대책이 있고 지방 호응도가 좋고 이러면, 내가 과연 어떻게 하면 이걸 후세대에 가서 내가 해논 일이 좋다카는 걸 할 수 있겠는가, 통영갓이 끊어졌을 때 경상도 사람이 와서 배와서 이렇게 해서 지금도 이렇게 전수되고 있다카는 그런 내가 해논 업적이 상당히 좋고 하는 게 아니겠나 생각을 했는데, 막상 지금도 마찬가지지마는 내 혼자 생각이지, 지방 사람들이 관심도도 그렇고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이 너무나 강하고. 그러나 막상 끊어지는 데는 그럴 수 없지 않느냐 나는 그런 생각이지만, 그건 쉬운 게 아니고.”

예천이 고향인 선생을 통영에서 객지 사람 취급한 데다 통영갓 전승자에 제도적인 뒷받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현실이 무척 서운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서울에 올라온 후로도 세상에 대한 선생의 서운함은 여전한 것 같다. 말로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현실세계는 냉엄하기 짝이 없어서 실용성이 담보되지 않거나 상품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풍토에 대해 선생은 강한 톤으로 비판한다. 그래서 선생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화정책 담당 기관 내지는 공무원 나아가 일부 경직된 학자들의 편협한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여러 차례에 걸쳐 피력하였다. 선생은 1991년에야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게 되는데, 이렇게 늦어지게 된 이유도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선생의 강직한 성품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져 가는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야겠다는 선생의 소명의식이 워낙 강했기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외길 인생을 꿋꿋하게 걸어 올 수 있었지만, 탄탄한 경제력이 뒷받침된 것 또한 삶을 지탱해 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선생이 대구에 사두었던 농장의 땅값이 크게 상승하여 상당한 재산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대구의 땅을 팔아 서울 강남에 건물을 사서 이것으로 경제적 기반을 삼으며, 전혀 수익성이 없는 그러나 우리의 혼과 자존심이 서려있는 갓 만드는 일을 본업으로 하고 있다.

대를 이어 가업을 지켜나가는 일이 아름다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제 갓을 실용적인 목적에서 구하려는 사람은 없다. 박물관 같은 곳에서 주문하여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아주 가끔 지방에서 제사 지낼 때 쓰려고 한다면서 주문하는 사람이 있다. 워낙 공이 많이 들어야 하는 데다 수요도 많은 편은 아니어서 일 년에 갓을 만드는 수는 10개 미만이다.
“갓을 필요로 하여 찾아 온 사람 중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갓을 유리관 안에 보관해서 아이들 교육용으로 쓰려고 한다는 사람을 딱 한 사람 봤어요.”

지금은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갓 만드는 일에 일생을 거는 이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선생의 업을 잇는 제자가 있는지 여쭈어 보았다. 처음에는 “이수자 두명이 있는데 배워 놓고두 안하려고 해요. 다른 직업이 있지요.”라고만 하신다. 제자 이름을 물으니, 그제야 정한성(32살), 정한신(29살)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아들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대를 이어 가업을 지켜나가는 일이 아름다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이면에 놓여있는 인간적인 고뇌를 누가 알아주고 이해해 줄 것인가. 어쩌면 아들들은 배워놓은 기술을 세상에 내놓지 않으려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지켜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정책적인 배려를 해주지 않는다면 통영갓은 아버지대에서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본업과 생업이 분리된 상태에서 어떻게 문화가 지켜질 수 있겠는가. 사라져 가는 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선생의 정신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전승되길 바라면서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