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예술인에게 듣는다 /  시인 조병화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돌아갑니다
- 편운 조병화 시인 -

만난사람 : 이동재 (시인, 문학평론가)

 

이동재 : 약력을 보니까 21년 생이신데요, 정정하신 모습을 보니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조병화 : 예, 반갑습니다. 그냥 이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이 : 제 개인적으로는 선생님하면 저 남쪽 통영이나 마산 어디쯤의 바닷가에서 살고 계실 것 같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조 : 그래요? 난 황해도인이냐고 물어볼 때가 많아요. 난 경기도 안성 사람입니다. 안성에서 9살 때까지 있다가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1학년을 다니다가 9살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 미동 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9살  이후 죽 서울 살림이지요.

이 : 그런데 제가 읽은 어느 글 때문인지 선생님하면 남쪽 어딘가에서 베레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는 소설을 전공했는데요, 선생님의 시를 보면 오영수 소설이 생각납니다. 혹시 그런 얘기를 들어보신 적은 없습니까?

조 : 그야말로 그 사람이 통영인가? 남쪽 사람이지.

이 : 제가 착각을 했나봅니다. 그래도 선생님의 작품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소설로 보면 오영수 씨와 비슷합니다.

조 : 오영수하고 제7회 아세아 자유 문학상을 탄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소설로 나는 시로. 그래서 비슷해 보이는지 모르지? 하여간 가깝게  지냈어요. 아세아 문학상은 여기 와 있는 아세아 재단에서 주는 큰 상이었어요. 내가 받은 게 1959년이에요. 그 이후 없어졌지만, 아마 시방도 있을거에요. 다른 활동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 때 문인들을 돕는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오영수하고 나하고 7회 수상자로 뽑힌 적이 있지요.

시와의 인연

이 : 예, 그렇군요. 선생님은 아주 긴 세월을 문단의 중심에서 생활해 오셨는데요. 좥명동시절좦인가 하는 선생님의 글을 보니까 전쟁을 전후로 한 문단의 풍경, 문인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더군요. 그 글을 읽다보니까  새삼 어려운 시절의 문단이나 문인들의 모습이 씁쓸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죽 문단 활동을 해오시면서 어려운 점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조 : 말씀드릴게요. 일제 시대 내가 생각하기로 난 안성에 있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러가지로 농사짓기가 힘들어서 우리 어머니가 농토를 팔아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넉넉치 않고 빠듯했어요. 그래서 생각을 했어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단단한 생활을 해야겠다고. 그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나  공부해봤자 거지 되는 생활이고, 그 시대엔 문학이나 화가나 이런 불확실한 생활을 하다가는 더 어려워질 것 같고 해서 자연과학을 공부했어요.
자연과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초등학교 교장이 나보고, 매번 1등을 했기 때문에 경성사범학교를 진학해서 우리 학교를 빛내 달라고 해서 경성사범학교를 추천해줬어요. 그때는 교장 말이 절대니까, 경성사범학교를 시험 봐서 됐어요. 경성사범학교를 들어가니 거긴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왜 하필이면 가난한 일본의 식민지의 아들로 나를 낳아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1학년 때 생각을 했어요. 이게 중요한 거에요. 그러자마자 냉랭하게 이것이 내 운명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내 운명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인생을 보다  많이 살다가자’ 이게 내 철학의 근원이에요. ‘인생을 보다 많이 살다가자’ 그러면 인생을 많이 사는 길이 뭔가? 그것은 인생을 많이 여행하는 길이다. 그 여행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연을 많이 여행하는 거고, 다른 하나는 세계를 많이 여행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자연은 건강과 틈만 있으면 얼마든지 여행하는데, 정신의 세계를 풍부하게 많이 여행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 책은 어떤 것을 읽을 것인가? 그 많은 책 중에 상상력을 풍부하게 길러주며 그 영혼의 세계를  여행시켜주는, 상상의 세계를 여행시켜 주는 것은 종교와 철학과 문학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자연과학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거든. 그것은 지식의 세계를  쌓아가는 거란 말야. 그래서  마음 속에 확실한 세계를 살려면 자연과학을 해야겠는데 하면서도, 보다 많은 인생을 살려면 여행을 많이 해야겠거든. 정신의 세계를 많이 여행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데 종교 서적과 문학 서적과 철학 서적을 읽어야 된다. 그러면 학업에도 지장이 안가고 많은 상상력을 단 시간에 가질 수 있고 짧막한 지식으로 얻어낼 수 있는 독서물이 뭐냐? 그건 시다. 그래서 시하고의 인연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학년 때부터 시집을 죽 읽어 온 겁니다.  동경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집을 읽어왔어요. 그래서 문학부 다니던 학생들보다 더 많은 시집을 읽었다고 나는 자부해요. 중학교 시절을 언제나 호주머니에 시집을 넣어가지고 시집하고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어요. 유명한 사람의 시냐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시냐  이것을 나는 따지지 않아요. 시는 짧으니까 짤막한 시간을 이용하기 좋아서 시를 읽기 시작했단 말야. 그러면서 시가 점점 나에게 주는 건 무어냐? 아 기쁨을 준단 말야, 용기를 주고 미래를 주고. 시와 더불어 중학교 시절부터 동경 생활까지 했는데, 시방 얘기한 즐거움을 주네, 용기를 주네, 미지의 세계를 열어주고 위안을 준단 말야.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고. 이러면서 시집을 읽어왔어요.
그러면 시가 나에게 준 직접적인 힘이 뭐냐?  3학년 때 럭비부에 있었는데, 선수 생활을 하게 됐단 말야. 보통 4학년 5학년 때부터 하게 되는데, 일찍이 3학년 때부터 하게 됐으니까, 그때 내가 당황을 했어요. 운동을 할 것인가 공부를 할 것인가? 공부를 하려면 운동은 버려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 때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 있었어요. 시구절이죠. -먼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면 등불을 켜가지고 간다- 이 짤막한 시를 읽은 기억이 난단 말야. 아 그렇구나 등불을 찾아다니면 내가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기숙사는 10시까지만 불을 준단 말야. 근데 독서실은 6시까지 불을 주는 방이 있었어요. 그 방을 찾아다니면 내가 낮에 운동한 만큼 시간을 벌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한다는 결심이 서서 그때부터 독서실을 찾아다녔어요. 선수 생활을 하면서, 그런 노력으로, 정말 노력이지. 잠자는 시간은 짧고 하니까. 그리고 또 하나 이런 게 있어요. 괴테의 파우스트를 국어 시간에 선생이 얘기한 게 있어서 사서 읽어봤더니,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 할 수록 방황하는 것이다- 이런 게 있어요. 4학년 겨울 방학때 읽었는데 그 방황이라는 게 마음에 들어서 몇 번 줄을 쳤어요.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 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다. 아 참 좋은 말이다. 그렇죠 한 번 훑어보면서 모르는 게 있으면 넘어가면서 나를 길러주는 말만 찾아서 시를 읽었어요.  소위 문학으로서 시를 읽은 게 아니라 나를 길러주는 말로써 시를 읽었단 말야.  파우스트에 또 이런 게  있어요. ‘항상 노력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노력한 만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거에요. 그와 비슷한 말로 또 이런 게 있어요. ‘항상 노력하는 사람은 어두컴컴한 길에 빠지더라도 그 길을 헤쳐서 자기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런 말들이 수두룩히 있어요. 이 선생도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런 말도 있잖아요. 유명한 말로 ‘영원한 여성은 항상 우리를 끄집어 올려준다’ 괴테 파우스트의 라스트의 말이지만, 아 이런 것이 나를 흥분시켰어요. 참 좋은 말이다. 청춘시절에 그런 시의 정신을 가지고 자연과학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중학교 때 읽은 말 한마디, 자연과학을 할 용기를 준 것이 무엇이냐면, 마담  퀴리의 전기를 읽었더니 한 줄로 이런 게 있어요. -자연과학자의 길은 쓸쓸한 갑충의 길이다- 쓸쓸한 갑충, 아  사춘기에 그 말이 얼마나 좋았는지, 아 그렇구나 마담 퀴리처럼 쓸쓸한 길을 걸어, 그리고 내 자신에게 뭔가를 투자해서 열심히 뭐 하나를 해야겠구나. 이런 마음을 길러가지고 와서 그 학교를 그 경성사범학교를 일본 학생이 80% 한국 학생이 20%인 그 어려운 학교를 톱으로 나오게 됐어. 그러고 나니까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은, 나를 더 넓게 만드는 세상을 찾고 싶었어. 괴테에 이런 말이 있어요. 파우스트의 서재를 메피스토펠레스, 보통 악령이라고 하고 파우스트를 선이라고 하지, 그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방에 들어와서 ‘너는 뭘 생전 꾸물꾸물 생각만 하고 있느냐? 사색만 하는 놈들은 창 밖에 새, 풀, 목초가 있는 줄도 모르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풀잎만 씹고 있는 양과 같은 놈들이다. 야 나가자 저 풀밭으로' 이런 구절이 생각이 났어요. 아 그렇다. 시퍼런 목초는 나를 살찌게 해주고, 시퍼런 목초를 찾아가야 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동경고등사범학교, 참 어려운 학교입니다. 그 학교를 지망할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무슨 과를 선택하느냐? 할 때, 일본으로 원정 다니던 선수니까 체육과에 가면 메리트를 얻을 것 같지만, 체육과? 뭐 밤낮 운동장에서 호각만 부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체육과를 집어치고, 내가 중학교 때 생각한 거 있잖아? ‘보다 많은 인생을 산다. 보다 많은 인생을 살려면 보다 많은 여행을 한다’ 보다 많은 여행을 하려면 보다 많은 지식이 필요해요. 지식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 보다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과가 뭐냐? 그래서 참 어렵지만 물리 화학과를 선택해서 간 것입니다. 동기는 그래요. 물리 화학과를 다니면서 시를 읽어온 것이 내 학생 생활이죠.

명동은 문화인들의 종합대학, 명동의 술집은 문인들의 세미나실

이 : 선생님께서 시에 입문하신 동기, 과정, 그리고 시가 선생님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좥명동 시절좦이란  선생님의 글을 보면 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문단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라 읽다보면 여러가지로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활동해오신  40년대 후반, 좌우대립기,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이후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문단의 중심에서 살아오시면서 느끼신 것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조 : 그것은 더 얘기를 해야 돼요. 그래서 학교를 나와 내 경성사범학교 모교에서 선생을 했단 말에요. 물리 선생을 하다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론이나 학문 비슷한 것을 가르치는 거지.  그러니까 남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주어가지고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단 말야.  교사가, 뭐 실험실이 있어 뭐가 있어, 내 자신도 더 해야 되는데. 교사 하면 봉급을  잘 주니까 먹고 사는 건 되지만 내 꿈이 없어. 그래서 교단 생활에 실망을 느꼈어요. 청춘 시절의 꿈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쓸쓸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경성사범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냐 마냐 이런 때 김기림이라는 시인이 영문과 교수로 왔어요. 그분이 내가 시를 쓰는 걸 보더니 물리 선생도 시를 쓰느냐? 시를 좀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줬더니, “선생님 이거 시집 냅시다” 한단 말야. 그 때 나는 김기림이가 대시인인 줄도 모르고 영문과 교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문단에 나오게 된 겁니다. 문단에 나온 해는 49년도에요. 그래서 또 금방 시집이 나온 게 50년도. 근데 6.25 동란이 탁 터진단 말야 50년에. 그래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부산서 제3시집 좥태양의 침실좦이 나왔어요. 그리고서 서울로 와서 좥인간 고도좦라는 시집을 냈더니 대학에서, 중앙대학에서 현대시를 맡아 달라고 해서 그리로 갔어요. 그때부터 명동 출입을 했는데 그때 명동은 정말 폐허였습니다.  피난 갔다 올라오니까 다방이 하나 보이고 주점이 보이고, 다방도 많이 생기고 술집이 많이 생기고 명동이라는 거리가 생길 때 모든 문화인들이, 예술인들이죠, 뭐 시인, 소설가, 평론가, 방송인들 신문쟁이들 모두 명동으로 모여있단 말야. 그땐 전화도 없으니까 원고를 받으려 해도 명동, 원고 교환 할려면 명동. 명동이 말하자면 온 문인들의 아니, 온 문화인들의 집합소가 되어 버렸어요. 그 원고료 받으면 자연히 술집에 가서 술 한잔 먹고, 그래서 술집이라는 게 문인들 천지지, 문화인들 천지. 그러니까 요즘 생각하는 명동이 아니라 명동의 술집, 다방 이런 게 다 예술의 세미나실이야. 그래서 내가 명동시절에 쓴 것이 좥떠난 시절 떠난 사람들좦인데, 거기도 썼어요. 명동은 우리들의 문화인들의 종합대학이고 술집 다방은 세미나실이다. 가난한 문화인들이래도 꿈을 얘기하고 인생을 얘기하고 자기의 고민을 얘기하고 그런 정신 활동을 했어. 그때야말로 요새 문화인들이 그리워할 정도로 우리 문인들은 가난했지만 정신적인 왕국이었어요. 그런 걸 내가 하나하나 생각나는 친구들을 쓴 것이 명동시대, 제목은 좥떠난 세월 떠난 사람들좦. 그 무렵은 뭐 다 방황이지. 괴테의 말처럼 노력하는 사람은 항상 방황한다. ‘방황과 모색’그게 명동시절이에요. 방황과 모색, 거기다가 하나 고민이 있다면 시대적인, 분단된 나라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 문제, 좌파다 우파다. 그런 속에서도 우린 갈라진, 좌파는 좌파대로 놀고 우파는 우파대로 놀았지만, 그런 대로 자기들의 꿈을 찾은, 하나의 세계를 살던 시대입니다. 그때 정말 나의 모든 예술이 익어가지고, 밑천이 돼서 풍부한 대학생활을 하면서  부족함 없는 인생을 펴가지고 온 것이 나의 삶이에요.
그런데 오늘날의 문단은 쪼개지고 쪼개지고 해서, 그것은 이데올로기 보다는 분파별로 무슨 잡지파다 무슨 그룹파다 또 무슨 파다 해가지고 자기들끼리 욕한단 말야. 자기들끼리 옹호하고 그러니까 이게 문단이라기 보다도 무슨 동인지의 그룹들같이 되어  버렸어. 요즘 문단이라는 건, 타파해야 돼요.  자기 그룹들만 옹호하고, 자기 그룹들만 작품 걸게 해주고 높이 평가해 주고, 좋은 작가들은 죽어가고. 뭐 민주화 물결을 탄 사람은 그걸 응시하면서 다시 생각하는 사람을 무시해 버리고. 민주화, 무슨 데모하는 사람만 큰 소리, 목소리만 산다는 거 우리가 70년대 80년대 다 그렇게 겪은 건데, 그 사람들이 민주화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 정말 문학을 했는지? 그런 거 20년대 카프시대 카프 문인들이 소리 높여서 우리 문단을 꽉꽉  잡았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남긴 말은 뭐야? 이데올로기는 죽고 예술은 남았다라던가? 예술은 죽고 이데올로기만, 그게 그거에요. 그때 카프 문인들 작품이 없어요. 작품은 쓰지 않고 이론 투쟁만 했단 말야. 그래도 작품 활동을 한 것은 우파들이란 말야? 인간, 휴머니즘을 지켜온 사람들의 문학이 오늘날도 한국의 주류 문학을 만들어서 오는 거 아닙니까?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가지고, 시대의 물결을 타고 소리지르는 게 그게 문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대가 50년대 돌다가 군사혁명이 돼 가지고, 독재정권 타도, 그 다음엔 민주화 이렇게 해서 오늘날 한국문단이 걸어온 겁니다. 그래도 거기에 말하자면 문단이란 게 생긴 게 처음이야 문총구국대, 문인협회, 문총이란 게 생겨가지고 오늘날 왔는데, 그 시비를 다른 사람이 가리겠지만, 그런 거 다 좋아요. 하지만 예술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유파 주장보다는 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를 고민하는 작가들의 정신에서 나오는 작가들의 작품,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철학을 가지고 일관성 있는 인생을 살 것을 젊은 세대에 당부하고 싶어...

이 : 과거를 회상해주시고 요즘 문단의 문제까지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일제 말기에도 그랬고 50년대도 그랬고, 이를테면 만송족같이 문단에서 기존 정치권에 아부하는 글을 써 온 문인들이 있었는데, 좌파 뿐만이 아니라 우파 내부에서도 이런 정치적인 문인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조 : 만송이라는 건 이기붕을 찬성한 사람들, 그런 건 어느 시대에도 있지 않았나요?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는 전두환 대통령을 극진히 찬양해서 덕을 본 문인들도 있고, 노태우 시대엔 노태우 시대를 찬양해서 자라온 문인들도 있고. 그것이 줏대가 없는, 자기 인생관이 없는, 말하자면 철학이 없는 문인들이라고 나는 생각을 해요. 시대에 편승하는 문인들, 그렇기 때문에 문인들은 변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변절은 독자에 대한 큰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자기의 작가 정신을 일관해야지만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만송족이니, 하는 등위정자들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득을 얻는 것은 자기를 팔아먹는 거죠. 자기 이름을 더럽혀온 문인들이죠.

이 : 요즘 조선일보의 문학상과 관련된 황석영씨나 이문열 씨의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 : 나는 그런 거 언급하고 싶지 않아요.

이 : 그러면 요즘 젊은 문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문단의 원로로서 한 마디 해 주시죠.

조 : 거 좋은 말입니다. 젊은 문인들은 첫째 어느 유파 그룹에 끼지 않아야 되요. 고독해야 되요. 문학, 창착하는 사람들은 다 고독합니다.  일시적인 고독을 면하기 위해서 어느 그룹에 낀다든지 어느 유파를 쫓아다닌다든지 이것은 다 잘못이에요. 쫓아다니면 이득도 있겠지. 빨리 매스컴을 타기도 하고. 뭐 매스컴 타는 것이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철학에 투철해야지만 되고, 자기 철학을 세우고서 일관해서 흔들리지 않아야  되고, 일관해서 흔들리지 않는 철학을 살면서 누구하고 비교를 하지 말고, 작품 비교할 필요 없어요. 물론 라이벌 같은 건 가질 필요가 있지만, 또 누구하고 경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흔들리지 않을 것. 매스컴 빨리 타려고 하지 않을 것. 경쟁하지 말 것. 그리고 누구하고 비교하지 말 것. 자기 인생을 일관해서 살려고 하는 철학을 길러갈  것. 나는 젊은 사람들에게 그걸 요구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자기 인생이 보이는 시들이 거의 없어요. 영원한 자기 영혼의 영혼성이라는 게 부족해요.

이 : 21세기도 이미 시작이 됐고, 민족의 통일도 생각해 봐야 하는 시기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생각하시는 한국문학의 미래나 전망에 관한 것이 있으신지요?

조 : 나는 보통 문학 단체나 어디서 내거는 21세기 문학의 과제, 21세기 문학의 회고와 전망 같은 건 다 넌센스라고  생각해요. 뭐가 무슨 과제가 있어요? 작가와 시인이 자기 인생을 자기 사는 냄새를 피우며 살 때 많은 독자에게 영향을 주며 이끌어가는 거지, 무슨 과제가 있어요?  그게 무슨 공식적인 겁니까? 문학에 무슨 답이 있습니까? 예술에는 답이 없는 겁니다.

편운 문학상 만들어…  

이 : 제가 알기로는 그림도 그리시는 줄 아는데요?

조 : 그림도 그리죠. 그림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죠. 20회나 전람회를 했어요. 전람회를 하면서 돈도 많이 얻었어요. 그걸로 내가 문학상 보충하고 있잖아요. 편운 문학상. 아 내가 왜 편운 문학상을 만들었냐 하면, 나는 경성사범학교, 동경고등사범학교 다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관비로,  일본 나라의 돈으로 공부를 했단 말야. 나이 70이 되니까 성춘복이 그러는 거야. 선생님 상 하나 만드십시다. 살아 있는 사람이 뭘 상을 만드나 했는데, 아 그 때 내가 생각한 거야, 내가 인생을 공짜로 살아왔구나. 공짜로 살아오면서 많은 장학금, 많은 상금을 받았구나. 그러니까 나도 젊은 사람들한테 갚아야겠다. 그래서 갚는다는 뜻에서 편운 문학상을 만들었단 말야. 작년이 10회야. 돈으로 따지면 나도 1억3천만 원 정도 썼어요. 일 년에 천삼백만 원씩 주니까. 그래서 문학상을 만들어가지고 젊은 시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하는 거지, 내가 내 자랑을 위해서, 이름을 내기 위해서 상을 만든 게 아닙니다. 정말 공짜로 배워서 공짜로 산 것을 갚기 위해서. 그 장학금 기금을 만드는데 그림 파는 돈이 많이 도움이 됐지요.   원고료 가지고, 글 써가지고 뭐가 돼요? 내가 나이 80이에요.  예술원 회장까지 했어요. 그래도 원고료 들어오는 데가 없어요. 이게  한국 문단의 문제야. 이게 무슨 문화 대국, 21세기의 문화 대국으로 가는 길입니까? 이런 것이 다 허망하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21세기의 문학의 과제다, 우리의 나아갈 길이다. 이게 다 헛된 말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 얘기한 거에요. 뭐 문인들이 살 수 있어야지. 소설가 몇 명 빼곤.

이 : 편운 문학상에 관한 것도 여쭙고 싶었는데 미리 말씀해 주셨군요. 앞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했듯이 문학은 자신의 작품을 남하고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좀 실례가 되는 질문  같은데요, 선생님 작품을 감상적이라거나 여성적 취향의 작품이다라는 주위의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조 : 나의 세계는 하나의 문학이 아니라 인생 철학을 담고 있는  토탈, 토탈은 내 인생입니다. 하나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나보고 다작하는  시인이다. 또는 어떤 성향이다라고 말하는 거 다 안 들어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을 지켜 온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누구의 말 듣지 말라는 거 젊은 사람들에게 말한 거,  그런게 거기 다 들어간 거에요. 문학이라는 게 자기 사는 길이지 남하고 무슨 비교를 해요. 다른 사람의 비평, 그건 그 사람이 느끼는 거죠. 너는 왜 곤색만 입고 다니냐? 너는 왜 회색만 입고 다니냐? 나는 곤색이 좋으니까 입는 건데 그걸 뭐라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 거에요. 물론 자기가 좌파라면 좌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가는 거고, 우파라면 우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가는 거지, 남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고 남의 작품을 가져다가 자기 잣대로 재는 건 절대 안 돼요. 오히려 좋은 작가를 죽게 만드는 거에요. 그리고 또 하나 평론가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있지만 몇 편 읽어가지고 남의 작품을,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해요. 그런 게 많아요. 싸움을 일으키고 우리 문단 사람들끼리 소외 감정을 일으키는 게 그런데서 온다고 봐요. 문인들을 문인들끼리 고독하게 만들어요. 남의 작품을 읽고서 칭찬을 하는 사람이 없어. 남의 작품을 읽고서 칭찬한다면 자기 그룹들만 칭찬하고. 그것이 우리 나라 문단을 아주 저속하게 만들어가는 겁니다.

이 : 혹시 요즘 시인들 가운데 선생님의 눈에 띄는 작품이나 시인이 있는지요?

조 : 내가 편운 문학상을 주기 때문에 기성  문인들의 작품은 다 읽고 뻔히 다 아는 거지만, 제일 고심하는 게 신인상을 줄 때에요. 신인상을 주기 위해 많은 젊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있지요. 그렇지만 아까도 얘기했지만 눈에 띄는 시들이 거의 없어요.

이 : 선생님 시집이 오십 권까지 나왔는데요, 우문인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가장 애착을 가지고 계신 자신의 시집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조 : 글쎄 내가 제일 어려울 때, 다 아는 것이지만, 군사 혁명 일어날 때, 그 때 쓴  것이 좥밤의 이야기좦란 시집이에요. 그게 제일 애착이 가지요. 그 무렵이 61년인가 그럴 겁니다.

이 : 선생님 굉장히 부지런하게 하루를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작업실에 나오시면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조 : 전에는 하루종일 작업실에 있었는데 이제는 기운도 없고, 이젠 시집 말처럼 좥고요한 귀향좦이니까. 시도 안 쓰려고 해요.   어머니 심부름 다 마쳤어, 나는.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원고 아니면 이젠  안 써요.

이 : 이미 선생님의 묘비가 세워진 것 같은데요, 경기도  안성인가요?

조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우리  뒷동산 어머니 묘소 옆에 있어요. 묘소도 만들어 놨으니까. 아귀다툼하는 문단생활도 졸업, 인생도 이젠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싫은 사람 안 만나고 이제는 인생의 정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 좥꿈의 귀향좦이라는 선생님의  묘비명(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이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선생님 장시간 동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