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예술인에게 듣는다 / 시인 조병화 |
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돌아갑니다 만난사람 : 이동재 (시인, 문학평론가)
이동재 : 약력을 보니까 21년 생이신데요, 정정하신 모습을 보니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조병화 : 예, 반갑습니다. 그냥 이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이 : 제 개인적으로는
선생님하면 저 남쪽 통영이나 마산 어디쯤의 바닷가에서 살고 계실 것
같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조 : 그래요? 난 황해도인이냐고
물어볼 때가 많아요. 난 경기도 안성 사람입니다. 안성에서 9살 때까지
있다가 거기서 초등학교를 다녔어요. 1학년을 다니다가 9살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서울 미동 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9살 이후
죽 서울 살림이지요. 이 : 그런데 제가 읽은
어느 글 때문인지 선생님하면 남쪽 어딘가에서 베레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는 소설을 전공했는데요, 선생님의
시를 보면 오영수 소설이 생각납니다. 혹시 그런 얘기를 들어보신 적은
없습니까? 조 : 그야말로 그 사람이
통영인가? 남쪽 사람이지. 이 : 제가 착각을 했나봅니다.
그래도 선생님의 작품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소설로 보면 오영수 씨와
비슷합니다. 조 : 오영수하고 제7회 아세아 자유 문학상을 탄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은 소설로 나는 시로. 그래서 비슷해 보이는지 모르지? 하여간 가깝게 지냈어요. 아세아 문학상은 여기 와 있는 아세아 재단에서 주는 큰 상이었어요. 내가 받은 게 1959년이에요. 그 이후 없어졌지만, 아마 시방도 있을거에요. 다른 활동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 때 문인들을 돕는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오영수하고 나하고 7회 수상자로 뽑힌 적이 있지요. 시와의 인연 이 : 예, 그렇군요. 선생님은
아주 긴 세월을 문단의 중심에서 생활해 오셨는데요. 좥명동시절좦인가
하는 선생님의 글을 보니까 전쟁을 전후로 한 문단의 풍경, 문인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더군요. 그 글을 읽다보니까 새삼 어려운
시절의 문단이나 문인들의 모습이 씁쓸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죽 문단 활동을 해오시면서 어려운 점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조 : 말씀드릴게요. 일제
시대 내가 생각하기로 난 안성에 있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러가지로 농사짓기가 힘들어서 우리 어머니가 농토를
팔아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넉넉치
않고 빠듯했어요. 그래서 생각을 했어요. 우리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단단한 생활을 해야겠다고. 그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나
공부해봤자 거지 되는 생활이고, 그 시대엔 문학이나 화가나 이런
불확실한 생활을 하다가는 더 어려워질 것 같고 해서 자연과학을 공부했어요.
명동은 문화인들의 종합대학, 명동의 술집은 문인들의 세미나실 이 : 선생님께서 시에
입문하신 동기, 과정, 그리고 시가 선생님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좥명동 시절좦이란 선생님의 글을 보면 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문단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라 읽다보면
여러가지로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이 활동해오신 40년대
후반, 좌우대립기,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이후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문단의 중심에서 살아오시면서 느끼신 것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조 : 그것은 더 얘기를
해야 돼요. 그래서 학교를 나와 내 경성사범학교 모교에서 선생을 했단
말에요. 물리 선생을 하다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이론이나
학문 비슷한 것을 가르치는 거지. 그러니까 남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주어가지고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단 말야.
교사가, 뭐 실험실이 있어 뭐가 있어, 내 자신도 더 해야 되는데.
교사 하면 봉급을 잘 주니까 먹고 사는 건 되지만 내 꿈이 없어.
그래서 교단 생활에 실망을 느꼈어요. 청춘 시절의 꿈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쓸쓸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경성사범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냐 마냐 이런 때 김기림이라는 시인이 영문과 교수로
왔어요. 그분이 내가 시를 쓰는 걸 보더니 물리 선생도 시를 쓰느냐?
시를 좀 보여달라고 해서 보여줬더니, “선생님 이거 시집 냅시다”
한단 말야. 그 때 나는 김기림이가 대시인인 줄도 모르고 영문과 교수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문단에 나오게 된 겁니다. 문단에 나온 해는
49년도에요. 그래서 또 금방 시집이 나온 게 50년도. 근데 6.25 동란이
탁 터진단 말야 50년에. 그래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요. 부산서 제3시집
좥태양의 침실좦이 나왔어요. 그리고서 서울로 와서 좥인간 고도좦라는
시집을 냈더니 대학에서, 중앙대학에서 현대시를 맡아 달라고 해서 그리로
갔어요. 그때부터 명동 출입을 했는데 그때 명동은 정말 폐허였습니다.
피난 갔다 올라오니까 다방이 하나 보이고 주점이 보이고, 다방도
많이 생기고 술집이 많이 생기고 명동이라는 거리가 생길 때 모든 문화인들이,
예술인들이죠, 뭐 시인, 소설가, 평론가, 방송인들 신문쟁이들 모두
명동으로 모여있단 말야. 그땐 전화도 없으니까 원고를 받으려 해도
명동, 원고 교환 할려면 명동. 명동이 말하자면 온 문인들의 아니, 온
문화인들의 집합소가 되어 버렸어요. 그 원고료 받으면 자연히 술집에
가서 술 한잔 먹고, 그래서 술집이라는 게 문인들 천지지, 문화인들
천지. 그러니까 요즘 생각하는 명동이 아니라 명동의 술집, 다방 이런
게 다 예술의 세미나실이야. 그래서 내가 명동시절에 쓴 것이 좥떠난
시절 떠난 사람들좦인데, 거기도 썼어요. 명동은 우리들의 문화인들의
종합대학이고 술집 다방은 세미나실이다. 가난한 문화인들이래도 꿈을
얘기하고 인생을 얘기하고 자기의 고민을 얘기하고 그런 정신 활동을
했어. 그때야말로 요새 문화인들이 그리워할 정도로 우리 문인들은 가난했지만
정신적인 왕국이었어요. 그런 걸 내가 하나하나 생각나는 친구들을 쓴
것이 명동시대, 제목은 좥떠난 세월 떠난 사람들좦. 그 무렵은 뭐 다
방황이지. 괴테의 말처럼 노력하는 사람은 항상 방황한다. ‘방황과
모색’그게 명동시절이에요. 방황과 모색, 거기다가 하나 고민이 있다면
시대적인, 분단된 나라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 문제, 좌파다 우파다.
그런 속에서도 우린 갈라진, 좌파는 좌파대로 놀고 우파는 우파대로
놀았지만, 그런 대로 자기들의 꿈을 찾은, 하나의 세계를 살던 시대입니다.
그때 정말 나의 모든 예술이 익어가지고, 밑천이 돼서 풍부한 대학생활을
하면서 부족함 없는 인생을 펴가지고 온 것이 나의 삶이에요.
자기 철학을 가지고 일관성 있는 인생을 살 것을 젊은 세대에 당부하고 싶어... 이 : 과거를 회상해주시고
요즘 문단의 문제까지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일제 말기에도 그랬고
50년대도 그랬고, 이를테면 만송족같이 문단에서 기존 정치권에 아부하는
글을 써 온 문인들이 있었는데, 좌파 뿐만이 아니라 우파 내부에서도
이런 정치적인 문인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조 : 만송이라는 건 이기붕을
찬성한 사람들, 그런 건 어느 시대에도 있지 않았나요?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는 전두환 대통령을 극진히 찬양해서 덕을 본 문인들도 있고,
노태우 시대엔 노태우 시대를 찬양해서 자라온 문인들도 있고. 그것이
줏대가 없는, 자기 인생관이 없는, 말하자면 철학이 없는 문인들이라고
나는 생각을 해요. 시대에 편승하는 문인들, 그렇기 때문에 문인들은
변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변절은 독자에 대한 큰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자기의 작가 정신을 일관해야지만 숭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만송족이니, 하는 등위정자들을 찬양하는 것으로 이득을 얻는 것은
자기를 팔아먹는 거죠. 자기 이름을 더럽혀온 문인들이죠. 이 : 요즘 조선일보의
문학상과 관련된 황석영씨나 이문열 씨의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 : 나는 그런 거 언급하고 싶지 않아요. 이 : 그러면 요즘 젊은
문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문단의 원로로서 한 마디 해
주시죠. 조 : 거 좋은 말입니다.
젊은 문인들은 첫째 어느 유파 그룹에 끼지 않아야 되요. 고독해야 되요.
문학, 창착하는 사람들은 다 고독합니다. 일시적인 고독을 면하기
위해서 어느 그룹에 낀다든지 어느 유파를 쫓아다닌다든지 이것은 다
잘못이에요. 쫓아다니면 이득도 있겠지. 빨리 매스컴을 타기도 하고.
뭐 매스컴 타는 것이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철학에 투철해야지만 되고, 자기 철학을 세우고서 일관해서 흔들리지
않아야 되고, 일관해서 흔들리지 않는 철학을 살면서 누구하고
비교를 하지 말고, 작품 비교할 필요 없어요. 물론 라이벌 같은 건 가질
필요가 있지만, 또 누구하고 경쟁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흔들리지
않을 것. 매스컴 빨리 타려고 하지 않을 것. 경쟁하지 말 것. 그리고
누구하고 비교하지 말 것. 자기 인생을 일관해서 살려고 하는 철학을
길러갈 것. 나는 젊은 사람들에게 그걸 요구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자기 인생이 보이는 시들이 거의 없어요.
영원한 자기 영혼의 영혼성이라는 게 부족해요. 이 : 21세기도 이미 시작이
됐고, 민족의 통일도 생각해 봐야 하는 시기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생각하시는 한국문학의 미래나 전망에
관한 것이 있으신지요? 조 : 나는 보통 문학 단체나 어디서 내거는 21세기 문학의 과제, 21세기 문학의 회고와 전망 같은 건 다 넌센스라고 생각해요. 뭐가 무슨 과제가 있어요? 작가와 시인이 자기 인생을 자기 사는 냄새를 피우며 살 때 많은 독자에게 영향을 주며 이끌어가는 거지, 무슨 과제가 있어요? 그게 무슨 공식적인 겁니까? 문학에 무슨 답이 있습니까? 예술에는 답이 없는 겁니다. 편운 문학상 만들어…
이 : 제가 알기로는 그림도
그리시는 줄 아는데요? 조 : 그림도 그리죠.
그림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죠. 20회나 전람회를 했어요. 전람회를
하면서 돈도 많이 얻었어요. 그걸로 내가 문학상 보충하고 있잖아요.
편운 문학상. 아 내가 왜 편운 문학상을 만들었냐 하면, 나는 경성사범학교,
동경고등사범학교 다 돈 한푼 들이지 않고 관비로, 일본 나라의
돈으로 공부를 했단 말야. 나이 70이 되니까 성춘복이 그러는 거야.
선생님 상 하나 만드십시다. 살아 있는 사람이 뭘 상을 만드나 했는데,
아 그 때 내가 생각한 거야, 내가 인생을 공짜로 살아왔구나. 공짜로
살아오면서 많은 장학금, 많은 상금을 받았구나. 그러니까 나도 젊은
사람들한테 갚아야겠다. 그래서 갚는다는 뜻에서 편운 문학상을 만들었단
말야. 작년이 10회야. 돈으로 따지면 나도 1억3천만 원 정도 썼어요.
일 년에 천삼백만 원씩 주니까. 그래서 문학상을 만들어가지고 젊은
시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하는 거지, 내가 내 자랑을 위해서,
이름을 내기 위해서 상을 만든 게 아닙니다. 정말 공짜로 배워서 공짜로
산 것을 갚기 위해서. 그 장학금 기금을 만드는데 그림 파는 돈이 많이
도움이 됐지요. 원고료 가지고, 글 써가지고 뭐가 돼요?
내가 나이 80이에요. 예술원 회장까지 했어요. 그래도 원고료
들어오는 데가 없어요. 이게 한국 문단의 문제야. 이게 무슨 문화
대국, 21세기의 문화 대국으로 가는 길입니까? 이런 것이 다 허망하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21세기의 문학의 과제다, 우리의 나아갈 길이다.
이게 다 헛된 말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 얘기한 거에요. 뭐 문인들이
살 수 있어야지. 소설가 몇 명 빼곤. 이 : 편운 문학상에 관한
것도 여쭙고 싶었는데 미리 말씀해 주셨군요. 앞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했듯이
문학은 자신의 작품을 남하고 비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좀 실례가 되는 질문 같은데요, 선생님 작품을
감상적이라거나 여성적 취향의 작품이다라는 주위의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조 : 나의 세계는 하나의
문학이 아니라 인생 철학을 담고 있는 토탈, 토탈은 내 인생입니다.
하나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나보고 다작하는 시인이다.
또는 어떤 성향이다라고 말하는 거 다 안 들어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을 지켜 온 거에요. 그러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누구의 말
듣지 말라는 거 젊은 사람들에게 말한 거, 그런게 거기 다 들어간
거에요. 문학이라는 게 자기 사는 길이지 남하고 무슨 비교를 해요.
다른 사람의 비평, 그건 그 사람이 느끼는 거죠. 너는 왜 곤색만 입고
다니냐? 너는 왜 회색만 입고 다니냐? 나는 곤색이 좋으니까 입는 건데
그걸 뭐라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런 거에요. 물론 자기가 좌파라면 좌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가는 거고, 우파라면 우파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가는 거지, 남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고 남의 작품을 가져다가 자기
잣대로 재는 건 절대 안 돼요. 오히려 좋은 작가를 죽게 만드는 거에요.
그리고 또 하나 평론가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있지만 몇 편 읽어가지고
남의 작품을, 인생을 이래라 저래라 해요. 그런 게 많아요. 싸움을 일으키고
우리 문단 사람들끼리 소외 감정을 일으키는 게 그런데서 온다고 봐요.
문인들을 문인들끼리 고독하게 만들어요. 남의 작품을 읽고서 칭찬을
하는 사람이 없어. 남의 작품을 읽고서 칭찬한다면 자기 그룹들만 칭찬하고.
그것이 우리 나라 문단을 아주 저속하게 만들어가는 겁니다. 이 : 혹시 요즘 시인들
가운데 선생님의 눈에 띄는 작품이나 시인이 있는지요? 조 : 내가 편운 문학상을
주기 때문에 기성 문인들의 작품은 다 읽고 뻔히 다 아는 거지만,
제일 고심하는 게 신인상을 줄 때에요. 신인상을 주기 위해 많은 젊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고 있지요. 그렇지만 아까도 얘기했지만 눈에 띄는 시들이
거의 없어요. 이 : 선생님 시집이 오십
권까지 나왔는데요, 우문인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가장 애착을 가지고
계신 자신의 시집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조 : 글쎄 내가 제일
어려울 때, 다 아는 것이지만, 군사 혁명 일어날 때, 그 때 쓴 것이
좥밤의 이야기좦란 시집이에요. 그게 제일 애착이 가지요. 그 무렵이
61년인가 그럴 겁니다. 이 : 선생님 굉장히 부지런하게
하루를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 작업실에 나오시면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조 : 전에는 하루종일
작업실에 있었는데 이제는 기운도 없고, 이젠 시집 말처럼 좥고요한
귀향좦이니까. 시도 안 쓰려고 해요. 어머니 심부름 다
마쳤어, 나는.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원고 아니면 이젠 안 써요.
이 : 이미 선생님의 묘비가
세워진 것 같은데요, 경기도 안성인가요? 조 :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난실리, 우리 뒷동산 어머니 묘소 옆에 있어요. 묘소도 만들어
놨으니까. 아귀다툼하는 문단생활도 졸업, 인생도 이젠 좋은 사람들만
만나고, 싫은 사람 안 만나고 이제는 인생의 정리기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 좥꿈의 귀향좦이라는 선생님의 묘비명(어머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이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선생님 장시간 동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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