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 문학웹진 |
문학웹진의 활성화를 위한 탐색 박영호
(문학평론가, 협성대 교수)
웹진이란 무엇인가 웹진의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은 검색엔진을 돌려보는 것이다. 야후 코리아
479건, 네이버 612건, 엠파스 498건 등이 검색된다. 1-2호를 내고 더
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는 다수의 웹진들을 염두에 두더라도, 이와 같은
수치들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더구나 웹진이 인터넷 상에서 구현되는
것이고, 국내 인터넷 사용자가 대중화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학력과
구매력이 높은 여론 주도 세력들이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파급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최근 초고속 통신망이나 무선 서비스의 확충과
같은 인터넷 인프라의 확대로 인하여 웹진 운영과 이용이 손쉬워졌다는
측면에서 그 영향력은 날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의 멀티미디어 서비스인 Web과 잡지를 뜻하는 magazine의 합성어이다. 종래의 종이 형태의 잡지와는 달리 인터넷이라는 통신망을 통해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온라인 잡지이다. 기존 잡지는 글이나 그림으로 제공되지만, 웹 잡지는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에 문자와 그림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그림이나 음악, 음성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각종 정보를 생방송으로 중계하듯이 제공할 수 있으며, 독자들의 요구를 파악해 이를 즉시 편집에 반영할 수도 있다.(http://www.cprice.co.kr/cdic/) 인용의 경우에는 ‘인터넷이라는 통신망을 통해 제공하는 새로운 형태의 온라인 잡지’라고 다소 광의(廣義)의 개념으로 웹진을 규정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제공된다는 최소한의 조건만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동영상, 음악, 음성, 실시간 정보 제공 등은 모두 “--할 수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그것이 필수 조건은 아닌 것처럼 밝히고 있다. 하지만 협의(狹義)의 개념으로 본다면, 웹 상에서 운영되는 잡지라고 해서 모두 웹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웹의 특성을 살릴 수 있어야 웹진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종이 잡지를 웹에 옮겨 놓았다고 해서 웹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옮겨만 놓았다면 그것은 ‘온라인 잡지’나 ‘인터넷 잡지’로 불러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웹의 특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이 잡지와는 변별되는 동영상, 음악, 음성 등의 멀티미디어적 요소의 적극적인 활용, 실시간 중계 혹은 네티즌들의 능동적인 참여 공간 확보, 그리고 관련 사이트와의 링크 등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웹 상에서만 구사할 수 있는 매체적 특성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운영되는 대부분 웹진의 경우, 웹진의 성격에 따라 광의의 웹진과 협의의 웹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프라인의 잡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 대부분 ‘온라인 잡지’ 형태를 유지할 뿐이고, 온라인 상에서만 존재하는 웹진의 경우는 대부분 멀티미디어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물론 영화 웹진은 오프라인 상에 잡지가 있는 경우라도 대부분 적극적으로 멀티미디어적 요소를 활용하고 있다. 즉, 웹진의 성격에 웹적인 특성을 활용하는 방법이나 정도가 달라지는 예이다. 이와 같이 국내 웹진의 경우 광의의 개념과 협의의 개념이 혼재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광의와 협의, 두 개념을 모두 포함해서 웹진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본고에서는 문학 웹진을 중심으로 웹진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발전 가능성과 전망을 타진해 볼 것이다.
문학 웹진이 활성화되는 이유 웹진이 활성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터넷 이용 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있고’, ‘초고속 통신망의 구축과 컴퓨터의 성능 향상으로 인터넷 인프라가 향상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웹진이 시도될 수 있었고’, ‘제도권 대중매체에 대한 강한 불만’, ‘운영비용이 크게 들지 않고’, ‘따라서 배너 광고 등을 통한 고수익의 유혹과’ ‘특정 분야에 대한 특화된 매니아 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 웹진이 활성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문학 웹진도 위에서 규명한 웹진의 일반적인 특성을 공유한다. 그 외에도 ‘문단의 섹트화에 대한 반발’, ‘문예지들의 채산성 악화’, ‘하이퍼 텍스트나 인터액티브 텍스트 등 새로운 문학적 형태의 시도’, ‘사이버 문학의 발전’, ‘Prosumer(생산 소비자)의 등장’, ‘쌍방향성과 실 시간성을 적극 활용한 창작 지도’ 등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문단의 섹트화 문제. 문단의 섹트화는 그 자체로 부정적이라고 평하기는 어렵다. 개인들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하는 문단에서 창작 방향이나 뜻이 맞는 이들끼리 하나의 섹트를 형성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어떤 의미에서는 권장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양한 의견들이 나름의 응집력을 갖고 발표할 수 있고, 그것들이 토론의 장을 형성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문단의 내실을 기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섹트주의는 그렇게 긍정할 만한 것이 아니다. 문단의 이해·친소 관계로 이미 고착화 양상을 보임으로써 그것이 발전적인 토론의 장을 형성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섹트 외의 의견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섹트 안으로는 자화자찬 식의 의전 비평이 횡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문학과 지성」과 「창작과 비평」을 중심으로 한 섹트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배제’를 통한 ‘차별화’의 전략을 구사했지만, 1980년대 이후 「문학과 지성」이나 「창작과 비평」 내부의 노선이 다변화됨으로써 상대적으로 권력이 약화되는 양상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수구적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내부적 결속의 강화’이다. 이와 같은 내부적 결속의 강화는 섹트 구성원들에게는 문예지를 동원한 평자들의 대대적인 ‘의전 비평’이나 출판에 있어서 우선권을 부여하는 등의 ‘선민적 특혜’를 부여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양분 전략을 구사해 왔다. 그 결과, 섹트 내부적으로는 비판이 없는 해설이나 상찬 위주의 비평으로 창작이나 비평이 발전할 수 있는 내적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황지우나 이성복 등이 번득이는 시재(詩才)에도 불구하고 조로(早老)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비평의 견제를 받으면서 스스로를 갱신해도 그 성공을 점치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무런 비평적 견제 없이 스스로를 갱신한다는 것은 또 얼마나 지난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그보다 더 폭력적인 양상으로 드러났던 것은 섹트에서 배제된 경우이다. 이 경우는 작품 발표 기회는 물론 발표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평단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사장되기 일쑤였고, 해당 문예지를 발간하는 대형 문학 전문 출판사에서 작품집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철저하게 봉쇄되는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섹트의 구성원들의 증가로 인하여 그들조차 발표 지면을 얻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문단이 주요 문예지를 중심으로 섹트화 되고, 섹트로부터 다시 권력이 창출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소장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최근 비판적 문제 제기가 계속되고 있고, 문제 제기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섹트를 뛰어넘을 수 있는 실천의 장으로서 웹진을 시도하기도 한다. 두 번째, 문예지들의 채산성 악화를 들 수 있다. 국내 문예지는 시장 규모를 고려할 때, 과잉 공급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발전적인 경쟁 관계 속에서 자기 색깔을 견지할 수 있다면 문예지의 수야 많을수록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각각의 문예지가 얼마나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 있는지는 차치하고, 과연 채산성을 맞추고 있는 것이 몇 개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가) 문예지는 원고료 도둑인가. 운문 1편에 1만 원, 산문 1장에 1천 원이라도 주면 감지덕지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혀를 차면서 생각을 돌려본다. 문예지가 많이 팔린들 사실 몇 권이나 팔릴 것인가. 재정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문예지를 다달이 혹은 계절마다 내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원고료를 주지 않는 문예지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은 큰 문제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글 쓰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으며 존재하는 문예지가 무슨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좋은 글을 실을 수 있으며, 좋은 작가를 발굴할 수 있겠는가. 내가 발행인과 주간을 알고 있는 문예지 중 꽤 여러 개가 원고료를 아예 주지 않거나 일부만 주면서 1년 간 정기 구독자 대우를 해주고 있다. 문예지 발행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바 아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자책하는 마음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확실히 수가 적다. (중략) (나) 문예지는 대개 개인이
하는 출판사(혹은 잡지사)를 통해 나오므로 특정 작가를 확보하고 관리하는
일에 봉사하는, 즉 들러리의 역할을 하는 수가 종종 있다. 문예지의
대다수 필자가 그 출판사 관리 작가의 들러리가 되는 것이다.
주식회사 체제가 되더라도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대주주가
몇 사람 있으니 말이다. 좋은 신인을 발굴하여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문예지 본연의 업무일 것이다. 그런데 독자에게 인기가 있는 특정의
작가를 묶어 두기 위한 관리용 문예지가 있다면, 그와 아울러 문학상을
주어 단행본을 판매하는 데 발판으로 삼으려는 문예지가 있다면 그 문예지
또한 문학의 발전보다는 자사의 이익을 위한 영리 수단으로 치부될 뿐이다.
이승하는 (가)에서는 문예지 경영이 어려워 원고료를 주지 못하는 문예지에 대한 문제, (나)에서는 필자 관리용으로 문예지를 발간하는 출판사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둘 다 문예지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장사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래서 오프라인 상에서 문예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 이것을 웹진 형태(정확히는 온라인 잡지 형태)로 전환시킴으로써 네티즌들을 독자로 이끌어 들일 수 있고, 문예지가 지니는 작가 관리나 출판사 홍보 등의 역할을 다변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특히 이와 같은 웹진들은 과월호의 DB를 제공함으로써 네티즌들을 유인하여 자사 출판물에 대한 홍보 효과도 거두고 있다. 네티즌들이 원하는 DB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출판사의 홈페이지를 경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문예지들도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어지간한 자본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오프라인 상에서 문예지를 발간하려는 시도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발간(운영) 비용이 저렴하고, 손쉽게 네티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웹진을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국내 통신을 통해 시도되던 사이버 문학이 웹 상에서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국내 통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다양한 표현 방법을 웹진이 구현했다는 의미와 동시에 사이버 문학이 좀더 다양한 방법으로 구체화되고 웹진을 중심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통신상에서 문자로만 구현되었던 텍스트가 웹 상에서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제를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보다 다양한 형상화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국내 통신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환타지나 무협 그리고 에로틱한 소설들이 웹 상에서 다양한 링크 과정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국내 통신보다 훨씬 자유로운 웹 상에서 수용자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장르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즉 특정 장르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는 웹진 형태의 공급을 낳았다. 아직도 이와 같은 형태의 문학을 문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견해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것을 문학으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떠나서 우선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좀더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00만 부 이상 독자를 흡입하고 있는 유인 요소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1만 부도 팔리지 않는 본격 문학 작품들에 대한 고찰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그것이 문학으로 인정받든 받지 못하든 간에 문학으로 읽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때, 앞으로 문학의 행로를 가늠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웹진의 쌍방향성을
이용한 Prosumer(생산 소비자)의 등장이다. 표준화 standardi-zation,
동시화 synchronization, 중앙집권화 centralization로 요약할 수 있는
제2물결 사회로부터 탈 표준화, 탈 동시화, 탈 중앙집권화된 사회의
제3의 물결로 이행을 주장한 토플러는 Prosumer 개념을 통해 생산자
중심의 근대적 질서와 구분한다. 토플러에 따르면 생산은 자기와 가족,
공동체를 위해 직접 수행하는 모든 무보수 노동, 즉 ‘소비를 위한 생산’과
시장을 통한 판매·교환을 위한 ‘교환을 위한 생산’으로 이루어졌다.
제1물결 사회에서 생산은 ‘소비를 위한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제2물결 산업 사회는 ‘교환을 위한 생산’을 중심으로, 즉 시장을 매개로
형성되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결합함으로써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제3의
물결 사회에서는 ‘교환을 위한 생산’부문에서 ‘소비를 위한 생산’부문으로
전환된다. 과학기술의 발달, 유료 서비스 비용의 급등, 관료적 서비스
체계의 붕괴, 구조적 실업 등이 문제가 되면서 가내 근무 체계 electronic
cottage라 부를 수 있는 ‘소수 만드는 사람 d0-it-yourselfers’이
생기고 그에 따라 ‘생산은 교환이 아닌 소비를 목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Prosumer란 생산자 productor와 소비자 consumer를 결합한 것으로,
생산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소비자를 말한다. 그래서 시장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초시장 trans-market’이 등장한다. ‘초시장’은
포스트 포디즘이 주목했던 다품종 소량 생산, 즉 소비자의 기호를 생산
과정에 반영하는 시스템으로, 소비자는 더 이상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의 주체로 전화한다.1) 종합 웹진 살롱(www.salon.com)이
지난 5월 사이트를 개편했을 때 살롱 운영자들은 수백 개의 항의 메일을
받아야 했다. ‘가로 스크롤은 왜 생기게 했느냐’‘제목하고 이미지는
왜 각각의 글로 바로 링크를 시키지 않았느냐’등등. 이러한 네티즌들의
요구에 의해 결국 며칠 후 살롱의 편집자인 데이비드 탈보트는 “여러분이
이겼습니다”라는 항복 메시지를 띄우고 다시 옛 디자인으로 복귀했다.
웹사이트가 더 이상 운영자의 소유가 아닌 ‘공공의 재산’이라는 의식이
보편화하면서 웹의 구조나 디자인에 대한 네티즌의 요구가 다양해지고
있다. (중략) 결국 전문가들은 사이트 개편 작업에 사용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지적한다. 넬슨은 “모든 것을 확
뒤집는 식으로 개편을 할 것이 아니라 부족한 점을 조금씩 보완해
가는 방식이 돼야 한다”며 “사이트 개편에 앞서 사용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것이 가장 절실하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처럼,
웹 상에서 네티즌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며, 따라서 웹진의
운영진도 역시 일방적인 생산자일 수 없다. 즉 웹의 쌍방향 소통으로
인하여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해체된 것이다. 문학 웹진의 경우 그 성격상 빠른 시일 내에 업데이트 하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문학 작품의 창작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비평 역시 새로운 작품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문학 웹진이 오프라인 상의 잡지들의 작품과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업데이트가 신속히 이루어지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Prosumer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이는 그 상품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웹진이 더 이상 상품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은 더 이상 방문하는 네티즌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최근 일부 문학 웹진들은 회원제로 전환하고,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보냄으로써 정기적인 방문자 수를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문학 웹진의 성패는 방문자나 회원 수를 얼마나 많이 확보할 것인가 하는 것도 관건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Prosumer를 되도록 많이 확보하는 것에 달렸다. Prosumer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웹진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고, 운영자가 미쳐 신경 쓰지 못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 개진해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Prosumer는 사이버 공간상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표적 마케팅이 효과를 거둘 경우 그 파급효과는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여섯째, 웹의 쌍방향성과
실 시간성이라는 특성을 적극 활용한 창작 지도 등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다섯 번째 이유였던 Prosumer의 등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지만, 최근 비교적 활발한 웹진의 특화된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별도 항으로 주목한다. 문학 웹진의 활성화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활성화’라는 말은 아직도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진행성에 주목하려고 의도적으로 사용한 말이다. 여타의 콘텐츠처럼 뚜렷한 수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권력을 창출하는 것도 아닌 웹진에 많은 운영진들이 정열을 쏟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직도 무한히 열린 가능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견고한 문화 권력이나 문학 제도가 더 이상 자신을 억압하지 않는 그 공간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문학적인 자유를 만끽하려는 내밀한 의지의 발로인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오프라인 상의 문예지들에 대한 도전적인 견제로서도 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현재 웹 상에서 계속 업데이트 되는 문학 웹진들의 현황은 어떠한가?
문학 웹진 현황 위의 표를 기초로 문학
웹진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또한 포탈이 선호되는
이유는 포탈이 가지고 있는 DB 때문이다. 포탈 운영진이 모아 놓은 질
좋은 문서 자료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과
웹>이라든가 <포에티카>는 다른 웹진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량의
문서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문학 관련 정보를 찾는 네티즌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둘째, 주의 깊게 표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42개 웹진 중에서 12개의 사이트가 폐쇄되거나 접속이
불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웹진이 수입을 배너 광고에
의존하고 배너 광고는 접속자 수를 따라간다고 했을 때, 상대적으로
접속자 수가 적은 문학 웹진의 경우는 경제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차단된 것이다. 수익이 없는 상태에서 문학 웹진을 운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웹진의 디자인이나 관리뿐만 아니라 원고료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문학 웹진의 문제점 문학 웹진의 문제점은
다양한 관점에서 그것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전문 필진의 원고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원고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웹진을 하나의 잡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다. 특히 아직 작품이나 논문 같은 것들을 웹 상에서
발표했을 때, 그것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웹에서 발표하였을 때, 저작권 문제라든가, 설사 저작권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뚜렷한 기준 역시 마련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하드웨어적인
측면의 제약이다. 특히 웹진이 사용하고 있는 서버의 용량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웹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10분 짜리 동영상 하나를 올릴 경우에도 그 용량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동영상 DB를 구축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지며, 설사 가능하다
해도 초고속 통신망이 깔려 있지 않은 네티즌의 경우 그것의
사용이 불가능하다. 셋째는 웹진의 아마추어리즘이다. 이 말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웹진에 실린 글들이 조야한 글이나 짧은 인상 비평에 머물고 마는 질적인 면에서의 부족함을 지적한 것이고’, ‘웹진의 운영에 있어서 경영 마인드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콘텐츠의 공유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노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먼저 웹진에 실리는 네티즌들의 글의 수준이 그리 높지 못하다는 것이다. 특히 조악한 표현과 아무런 고민 없는 기계적인 갈등과 진공의 세계관이 그 수준을 드러내는 표식이다. 익명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한다는 데 굳이 토를 달 이유는 없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웹진은 읽는 이를 전제로 한 매거진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전문 필진들이 부재하거나 들러리 식으로 한두 편 삽입된 웹진의 경우, 웹이라는 무한히 열린 공간 속에서(따라서 엄청난 잠재적 독자들이 상존하는 곳에서) 그토록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글 쓰기가 마치 배설되듯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우려해야만 될 일이다. 또 하나, 웹진의 운영에 있어서 경영 마인드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상에서의 모든 문화 행위는 언제든 필요에 따라서 환금(換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학 웹진의 제1 고민이 원고료라는 점은 모순이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웹진의 운영에 경영 마인드를 도입하면 어떨까? 1996년 OECD는 <The Knowledge-based Economy>라는 보고서를 통해 미래의 경제에서 지식 기반 산업 knowledge-based industry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제까지의 생산 방식과 경제의 성장에 있어서는 단순히 대량생산의 기술들이 중요시되고 그러한 기술들의 정형화된 지식 codified knowledge이 축적되는 것이 중요하였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정형화 될 수 없는 지식, 즉 암묵적인 지식 tacit knolwedge의 생성과 파급이 경제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로 등장하였음을 선포하고 있어 이후 지식 기반 산업과 이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경제의 연구에 대한 도화선을 이루었다. OECD 보고서는 지식 기반 경제를 ‘지식과 정보의 생산, 유통, 사용이라는 것에 직접적인 기반을 둔 경제(economies which are directly based on the production, distribution, and use of knowledge and information)’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식과 정보의 창조와 이의 파급으로 인하여 운영되는 경제라는 것이다. ---- 지식 기반 경제와 문화산업, http://seriecon.seri.org/ 인용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지식 기반 산업의 가장 비근한 예가 웹 상의 콘텐츠다. 이와 같은
콘텐츠의 자립적인 형태 중의 하나가 웹진이다. 더구나 문학 웹진처럼
Prosumer의 창출이 용이한 구조의 콘텐츠도 많지 않다. 즉, 웹진의 경제적
가치 전화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문제는 웹진을 구성하고
있는 하위 콘텐츠들과 그것을 수익을 고려한 구조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연결network시킬 수 있느냐이다. 대량생산의 시대에서 생산이 지속되면 그 생산물의 제조에 필요한 최적의 자원은 점점 고갈되고 따라서 최적이 아닌 자원으로 이어지는 생산은 필연적으로 수확의 체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경제 성장은 자원의 이용과 생산의 극대화라는 차원에서 검토되는 최적화의 논의 아래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식 기반 경제는 이러한 논의가 수확 체증이라는 환경 하에서 완전히 거부된다. 생산이 지속되면 오히려 수확이 증가하는 구조 속에서 최적화의 의미는 퇴색하고 마는 것이다. 수확 체증이 적용되는 체제에서 최적화의 해법은 지속적인 생산의 증대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수확 체증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최적화의 논의가 아니라 그러한 법칙의 적용을 받는 새로운 아이템의 발굴인 것이다. 현재 세계의 모든 나라가 이렇게 무한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아이템이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으며 과연 이 아이템들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환경이 어떻게 형성되어야만 하는가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지식을 중요시하는 경제 환경의 설정이며 이렇게 탄생된 지식의 보급을 원할히 하는 구조적 변화를 꾀하려는 것이 지식 기반 경제로의 이행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이다. ---- 지식 기반 경제와 문화산업, http://seriecon.seri.org/ 이 보고서의 의견을 신뢰한다면,
문학 웹진의 경우 새로운 아이템의 발굴은 곧 엄청난 부가가치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프라인 상에서 문예지의 위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문학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지식 기반 산업으로의 편입이
어렵다. 순수한 문학보다는 문학에 어떤 것이 섞이는 이종 교배, 즉
문학적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활용할 수 있도록 주변 장르나 여타
산업과의 제휴가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넷째 문제점은 문학 웹진의 안이하고 성실하지 못한 업데이트 현황이다. 세 번째에서도 지적했지만 웹진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마추어리즘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것은 문학 웹진을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할 때, 가장 손쉽게 일어난다.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웹진을 6개월 이상 지속하는 것은 순전히 문학에 대한 열정이라고 치부하던 시대는 지났다. 보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견지할 때, 수익 창출은 물론, 그 수익을 바탕으로 한 좀더 양질의 웹진이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 웹진의 상품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성실하고 신속한 업데이트다. 신속하고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지식을 축적할 수 있고, 그것의 집적도에 따라서 콘텐츠의 상품성이 결정 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 웹진들을 꼼꼼히 뜯어보면 1~2회 업데이트를 해보고 별다른 반응이 없으면 관리를 포기하거나 업데이트를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글로 도배를 하는 등 매우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다. 문학 웹진의 문제점은 상당 부문 일반 웹진의 그것과 맥이 닿아 있다. 여기서 사이버 문학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온 평론가 이용욱의 글로 문제점을 마무리해 보자. 웹진을 만들어 내는 생산자들의
마인드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문화 웹진들이 ‘대안 문화’ 또는
‘인디문화’의 전도사로서의 가능성을 구체화시키며 확고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기 위해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과제는 ‘공간 마인드’와
‘생산 마인드’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일이다.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처녀지에 순수한 소명 의식만으로 웹진의 깃발을 꽂았던 열정이 문화
웹진의 1단계 마인드였다면, 정기적인 업데이트, 질적인 향상, 독창적인
컨텐츠 개발을 통한 종이 잡지와의 차별성 구축은 문화 웹진의 2단계
마인드이다. 진보인가 정체인가, 지금 우리의 문화 웹진은 중요한 두
갈래 선택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문학 웹진의 개선 방안 문학 웹진은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할 곳이다. 더 이상 누구도 400~500쪽 짜리 문예지를
구입하거나 찾아 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첫째 정기 구독자가 아닌
경우 문예지를 구입하기 위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으며, 정기 구독자의
경우는 한번에 목돈을 내야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구태의연한 형식의 작품들과 읽히지 않는 활자들이 콩나물 시루처럼
들어찬 문예지를 읽는 것은 여간한 인내심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문예지가 스포츠 신문의 연예 기사를 압도할 만큼,
흥미롭고 생산적인 논쟁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대형 서점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쌓여 있는 문예지가 지금과 같은 출혈을 감수하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갈 것인가? 문예지의 과월호 할인 판매는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복잡한 마음으로 현장에서 오랫동안 웹진을 만들어온 <오프오프>의
김태형 시인과 짧은 인터뷰를 시도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웹진이라는 공통의 테마를 가지고 고민을 나누기 때문인지 김 시인의
차분한 음성이 낯설지 않았다. 그는 최근 <오프 오프>와 <텍스트
버그>를 하나로 합치는 웹진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운영해온 <오프오프>의 수익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했다. 필자가
살펴본 <오프오프>는 알찬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배너광고
하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프오프>의 경우 웹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가 보였다. 미당의 「화사」의 몇 시를 오디오
파일로 올려 놓는다든가, 시나리오 작업에 필요한 툴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든가, 여타의 문화 웹진과 링크를 걸어 놓았다든가
하는 점이 그랬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서
그것이 그렇게 성공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웹진 운영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좋은 원고를 얻는 일이라고 했다. 고료를 충분히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프라인도 아닌 온라인의 잡지에 선뜻 글을 주려고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문인들 홈페이지를
제작해 주고, 그 홈페이지와 링크를 걸어 콘텐츠를 확충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고 했다. 먼저 웹진의 운영진들은 웹진만의 특성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드웨어적인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오프라인 잡지들과 분명히 차별화 될 수 있는 다양한 시도가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문학 웹진이 하나의 상품이라는 인식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터넷 마켓팅의 불변의 법칙들, 즉 1) The Law of Leadership 선도자의 법칙 - 더 좋은 것 보다는 맨 처음이 낫다. 2) The Law of the Category 영역의 법칙 - 어느 영역에 최초로 들어간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최초로 뛰어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라 3) The Law of the Mind 기억의 법칙 - 시장에 먼저 들어가는 것보다 기억 속에 맨 먼저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새로운 형식의 문학
실험도 적극적으로 시도함으로써 웹진만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있고,
결국 정체성의 확보가 문학웹진의 상품성에 다름 아닐 것이다. 또한 문학웹진을 지원한다
하여 얼마의 지원금만 던져줄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웹진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드웨어의 지원도 함께 해야 한다. 특히 이렇게 길러낸 웹진을
주변의 다른 것과 연계하여 새로운 콘텐츠로 발전시킬 방법은 없는 것인지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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