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비평과
'용각산 글쓰기'
박용숙
(미술평론가, 본지편집자문위원)
그리스 속담에 ‘발톱으로
그 사자를 안다’는 말이 있다. 같은 뜻을 우리 속담에서는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고 한다. 양쪽이 부분은 전체를 나타낼
수 있다는 소위 파르스 프로 토토(pars pro toto)의 사고를 함께 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두 속담을 서로 바꾸어 써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두 속담은 각기 서로 다른 의미소(意味素)를
담고 있는 독립된 몸집(集藏體)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므로 두 속담이
같은 값으로 서로 맞교환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인문학적인 인프라
구축되어 있지 않은 슬픈상황
논의의 편의상 그리스
속담을 ‘발톱’이라고 말하고 우리 속담을 ‘떡잎’이라고 한다면 결국
‘발톱=떡잎’의 등식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우선 발톱은 정글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 이른바 야수의 생태를
상징하고 떡잎은 야수들의 활동무대가 되긴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오직 스스로의 성장에만 몰두하는 식물의 생태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발톱은 마치 골프게임처럼,
서로 앞을 다투어 이 구멍에서 저 구멍으로 이동하며 공간을 정복해
나가는 수평양식이라면 떡잎은 긴 장대를 타고 수없이 되풀이 뛰어오르기만
하는 높이뛰기의 수직양식에다 비견할 수 있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그 내용물이 다른 것을 그대로 바꾸어 먹는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큰 화를 불러 일으킬 수가 있다. 화두가 적절한지 어떤지는
자신이 없지만 어쨌든 나는 일차적으로 발톱을 외래적(서구)인 것으로
그리고 떡잎을 우리것(전통)으로 설정해보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미술비평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이 두 개념을 통해 그 진실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미술비평가로 등단하여 활동을
개시하던 70년대초의 일이다. 모 화장품회사가 발행하는 광고잡지에
지금은 원로화가로 거의 작품활동이 없는 C씨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그
해설문에서 ‘속임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이 말은 불어의
‘Trompe-l´oeil’라는 말을 필자 나름으로 번역한 것으로 초현실주의
화가들에 의해 즐겨 사용되었던 기법의 일종을 지칭하는 말이다. 물론
나는 아직도 이 번역이 잘된 것인지 어떤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구체적인
공간을 모호하게 만들어 회화에서 의미당하는(Signifier) 지평을 거세하려는
일종의 조형적인 음모의 기법이라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다. 어쨌든 나의
글을 접하게 된 C씨는 글의 내용을 깊이 음미해 보지도 않은 채 그 글을
대뜸 자신의 그림을 속임수로 그렸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만 판단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머지 제3자를 통해 그의 분노를 나에게 전달하였다.
나는 즉각 전화를 걸어 C씨에게 오해임을 해명하려 하였으나 그는 끝내
전화받기를 거절하였는데 그로부터 무려 3년 동안이나 나는 그에게 비정하게
안면몰수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 용어가 그렇게 나쁜뜻이 아니라는 시실을 깨달았는지
조금은 어색했으나 다시 몰수해간 나의 안면을 돌려주는 수준으로 되돌아오긴
했다. 한 장면의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라고 할 수 있지만 이 해프닝은
실상 발톱이론이 공격하고 저항받을 만한 인문학적인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벌어진 우리의 슬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비평가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아무튼 풍차를 성으로 알고 돌진하는 우스꽝스런
삽화이지만 결국 우리의 미술비평에서 발톱이론이 자리잡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보여준 좋은 실례이다. 그렇다고 해서 떡잎이론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잘해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70년대는 발톱의 인프라가
확산되는 추세였다
70년대의 <묵림회>는
먹(墨)을 서구의 추상표현주의로 번역하려는 전위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그 결과 운염(暈染)이라는 전통적인 회화의 기법(효과)이 추상표현주의의
소위 무의식의 붓질과 결합되면서 우리의 비평을 떡잎의 이론적 기반으로부터
발톱의 이론기반으로 옮겨 놓는 계기를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호의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 운동의 중요한 인물들의 의식에는 발톱과 떡잎의 화해를
도모하려는 창의적인 메시지가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운동은 얼마 가지 않아서 막을 내렸는데 그것이 만일 성공적이었다면
우리는 좀더 긍적적으로 한국미술을 이야기하고 좀더 진지하게 글쓰기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필자는 그때 그들의 작품들을 이야기하면서
‘운염’이라는 한자용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이를 ‘번지기’라고 명명하는
시도를 했는데 그것은 한자의 ‘暈’이나 ‘染(渲)’을 우리말로 적었을때
‘번지기’라고 쓰는 것이 그렇게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해설하면서 격렬한 붓질의
자국이나 먹의 그 미묘한 움직임을 단순히 ‘번지기’라는 말로 언표하는
것은 전혀 적절한 코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번지기’는
결국 발톱과 떡잎이 서로 교환되거나 합치는 데 있어서 마찰계수가 발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통용될 수 있는 특권적인 ‘죠커’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번지기’를 브러쉬 스트로크(Brush Stroke)로 이해한다면
이들 <묵림회>의 시도는 경주 한국판 액션페인팅을 모방하는 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번지기’는 물리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그들의 붓질을
단순히 ‘번지기’라고 말하는 것도 그들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결과가
된다. 떡잎 이론에서 ‘운염’의 참뜻은 ‘먹이 스스로 움직인다’이다.
이 뜻은 결코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주객(主客)이 분리되지
않는 존재의 어떤 근원적인 것의 의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브러쉬 스트로크’는 오토마티시즘과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으나 언어학의
개념으로 보자면 대체로 의미당하는 지평(Langue)을 거부하는 주관성의
몸짓(의지)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들 수묵의 추상표현주의가
성공하자면 발톱과 떡잎의 인문학적인 인프라가 충분히 구축된 기반위에서라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의 70년대는 발톱의 인프라가 엉성한
모양이긴 했지만 바야흐로 확산되는 추세에 있었고 떡잎의 인프라는
도리어 고사하여 그 무덤에는 이내 잡초만 무성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떡잎이론으로 발톱이론에 대항한다는 것은 애당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발톱이론이 그 본고장에서처럼 왕성하게 전개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80년대까지만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미술대학은
미술이론은 물론이고 실기를 위해 필요한 제반 인문학이 거의 소외되는
척박한 상태에서 예비화가들이 생산되었다. 양념처럼 끼어 있었던 이론과목(미술사와
같은)은 실기교수가 적당히 얼버무리며 땜질하고 교양필수는 학생들에게
대학졸업장을 얻기 위한 장애물넘기 쯤으로 여겨졌는데 이런 사태는
물론 지금도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유명한
뒤생의 ‘샘(변기)’은 고사하고 피카소의 ‘게르카’를 제대로 이야기하고
감상하는 화가들이 드문 형편이다. 우리의 미술대학이 서양의 인문학을
밑천으로 장사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인데, 이런 형편에서 아직도 발톱이론이
제대로 발을 붙일 만한 튼튼한 발판이 구축되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발톱이론이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은 1970년의 <AG>그룹이 등장하면서라고 여겨진다. 주로 홍대출신의
젊은 작가들로 구성된 이 그룹에는 그 무렵을 전후해서 파리에서 귀국한
이일(李逸), 유준상(劉俊相)이 있었으며 그 뒤에 일본의 이우환(李禹煥)이
가담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일은 <AG>그룹의 대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막강한 영향을 미쳤던 비평가였다. 이일의 초기 비평이론은
다소 모호하고 혼란스러움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구조주의 비평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소위 ‘환원과 확산’의 이론은 그런
문맥하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보았을 때 그의 발톱이론이
어딘가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슬픈 일이기보다는 우리의
불행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지적했지만 그가
파리에서 들고온 발톱이론이 우리쪽 놀이판에서 멋있게 놀이를 하자면
그 이론이 발을 디딜만한 인문학의 인프라가 충분히 구축되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실제로 학문만이 아니라, 발톱이론에 걸맞는 사회제도나
의식구조가 선행되고 그런 환경에서 생산된 생동하는 작품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70년대는 비록 시장경제가 그
틀을 잡아가는 과정에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여전히 제도나 개인의 의식구조에
있어서는 봉건왕조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입된 발톱이론이 발을 뻗자면 당연히 그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인프라가
인위적으로 급조되어야 한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AG>그룹활동은
다름 아닌 발톱이론이 발을 붙이기 위해 급조된 인위적인 텍스트 만들기
운동이라고 해야 옳다. 물론 인위적인 텍스트 만들기가 먼저 있고 그
뒤에 발톱이론이 그것에 기생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전후관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AG>운동은 거의 두 관계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AG>그룹에는 소위
60년대의 미국적인 미술로 부각된 여러 경향의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미니멀아트, ABC, 개념미술, 커네틱, 팝, 해프닝, 이벤트 등이
그것인데 이들 작품양식들은 몽땅 이땅의 튼튼한 인문학적인 인프라기반을
토대로 창작된 것이 아니라 전량 구미로부터 수입된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기계가 수입되면 그것의 용도나 작동방법을 설명하는 해설책자가
따라붙듯이 발톱이론이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70년대의 한국현대미술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므로 이론은 비평으로 발전되었던
것이 아니라 계몽적인 해설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추세이다.
이론은 있지만 비평이 없었다는 말은 이래서 비평가의 태업을 변호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우리는 규칙과 게임이 함께
수입된 스포츠 종목을 많이 보고 있다. 예컨대, 하키라든지 유도, 축구,
레슬링, 권투, 골프, 펜싱 등등 이런 종목들에 우리가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내자면 게임연습은 물론 규칙도 잘 알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좋은 해설자가 된다는 것은 해설자가 직접 본고장의 게임을 많이 보고
경험하면서 왜 그런 규칙이 생겨났는지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씨름이나 태권도와 같이 게임이 우리쪽에서 만들어진 것 이라면
그렇게 소란을 떨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박진감있는 게임이며 관중이며
좋은 해설이 지행되게 마련이다. 잘알고 있듯이 월드컵에 진출하기
위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대표팀에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기도
하고, 실제 선수들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용병들을 불러들여 프로팀을
운영하기도 한다. 우리도 그렇지만 우리 축구는 아직 월드컵에 16강에
드는 일도 쉽지않은 상태이다. 우리의 현대미술도 그 상황으로 보면
스포츠 논리와 다르지 않다. 파리나 뉴욕에서 온 외국출신(유학)의 감독(비평가)이나
선수(화가)들로 오늘의 화단 지도를 바꾸어 놓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대세라고 하더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은 게임만은 주체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아무리 큰 비중을 갖는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팀(선수)이 참가하지 않는 게임을 보는 것과 비중이 낮지만
우리팀이 참가한 게임을 보는 것은 그 진지함에 있어서 천지의 차가
난다. ‘유로 2000’의 결승에서 아무리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열기가 우리의 거리를 조용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비록 친선게임이라고 할지라도 한·일이
맞붙는 게임이라면 어김없이 종로거리가 썰렁할 정도로 인적이 한산해지는
것은 게임이 우리 것이기 때문이다. 해설자의 역할이나 해설가의 글쓰기가
그토록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것도 그 게임이 우리것 이기 때문이다.
미술비평 전문지 없어…
이 말은 발톱이론이건
떡잎이론이건 좋은 해설가가 있으려면 그 게임이 우리의 놀이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 아는 일이지만 미술비평계에는
전문지라는 것이 없다. 이것도 비평활동을 고사시키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이런 형편이므로 비평가는 미술잡지에 상업적인 글쓰기를
하거나 화가들의 전람회용 카다로그에 서문을 쓰는 일로 체면을 유지한다.
이들 글쓰기는 발톱이론이든 떡잎이론이든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행위이고
이 역시 비평이기 보다는 비평가의 명함을 지키는 최소한의 직능으로
결국 비평이 없다는 비난을 정당화시키는 증거로 이용될 뿐이다. 필자
자신도 카다로그 서문을 쓰고 있긴 하지만 이런 글쓰기를 단 한번도
비평활동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으며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충성스런
해설가’쯤으로 생각하면서 위안을 받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 비평이라고
생각하든 해설이라고 생각하든, 관계없이 이 카다로그 서문에는 반드시
아무개 이름뒤에 ‘미술비평가’라는 명칭이 찍힌다는 사실은 엄연한
현실이며 실로 멋쩍은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관행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에게도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의 양쪽이 협업하는 화가와 비평가의
게임이 있게 된다. 우리들의 제도(민주주의)가 그렇듯이 비록 게임은
잘 되지 않지만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어야 하듯이 우리에게도 비평가,
화가, 화랑, 미술관은 존재하고 그 비슷한 놀이도 진행되고 있다.
흔히들 카다로그 서문을 가리켜 ‘주례사’라고 말한다. 남의 잔치에
가서 축복은 고사하고 신부의 과거가 어떻구 신랑의 전력이 어떻구 시비한다면
그 주례는 거기에서 맞아 죽을 것이다. 카다로그 서문 쓰기도 이런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신랑, 신부를 분에 넘치게
추켜세워서 삽시간에 왕자와 공주를 만든다는 것도 빈축받을 일임에
분명하다. 카다로그 글쓰기를 ‘주례사’라고 빈정됐던 것도 결혼식의
주례사처럼 비평가가 그 서문에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그 화가를
분에 넘치게 추켜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카다로그 글쓰기가
매우 어렵고, 또 진땀나는 일이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카다로그 글쓰기
한때 유행하는 말이었지만
카다로그 서문을 가리켜 ‘용각산’이라고 한 것도 이런 정황을 반영한다.
용각산(龍角散)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는 데 효험이 있는 약이다. 그
제약회사의 광고가 한때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닙니다.’라는
말로 상품의 이미지를 기묘하게 부각했는데 이 말이 카다로그 글쓰기에
비유되었던 것이다. 이 광고문에 따르자면 카다로그 서문을 무난하게
쓰는 방법은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닌, 이른바 욕도 아니고
칭찬도 아니게 애매모호하게 쓰는 일이 된다. 칭찬하면서 욕하는 일은
차라리 쓰지 않느니 보다 못하며 그렇다고 욕한다는 것은 결혼식장에서의
주례처럼 애당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물론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게 쓰는 일은 글쓰기가 문자(언어)를 매개로 하는 일이므로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카다로그를 쓰기에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서는 방법은 해체주의가 된다. 이미 70년대의 이 일은 ‘환원과
확산’이라는 논리로 <AG>활동을 대변했다. 그 논리는 경우에
따라서 현상학적이기도 하고 물리학의 개념처럼 틀리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구조주의 비평이 그러하듯이 그는 작품에서 화가와 세계가 서로
연결되는 의미의 탯줄을 단절시키면서 작품을 하나의 자율적인 객체(object)로
독립시키려는 글쓰기 시도에 매달렸던 것이다. 이런식으로 그의 카다로그
글쓰기는 텍스트의 주인(화가)과 어떤 경우에서든 마찰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글쓰기가 텍스트와 전혀 무관하게 진행되거나 같은 글쓰기가
여러 카다로그에서 판에 박은듯이 되풀이 나타나도 이상할 것도 없으며
이에 저항하는 화가도 없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의 글쓰기는 시종일관
이항대립(二項對立)으로 엮어지는 이른바 언어(Languge)의 지평으로는
나가지 않는다. 그의 글쓰기가 확신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의미를 찾는
해석의 입장이 아니라 암호를 푸는 소위 독해(Lecture)의 입장이었다는
것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서로의 입장은 다소
다르지만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에끄리츄르(Ecriture)라고 명명했던 것,
혹은 데리다에 의해 차연(差延)이라고 명명되었던 이 독해의 글쓰기는
90년대이후 포스트모더니즘세력의 유입과 함께 그 활동이 확산되면서
80년대의 민중미술의 우세를 역전시켰다. 그리고 해체주의라는 새 병기로
무장한 이들 신진 비평가들은 평단의 새로운 주목을 받으면서 그 글쓰기의
위력을 확산시켜 갔는데 거기에는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70년대
이후, 급속히 진전된 우리 시장경제체제나 사회구조에서 비록 서방 선진국에
비해서는 취약하지만 그 인프라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발톱이론이 먹혀들만한
기반이 구축되어갔기때문이다. 예컨대 팝(pop)적인 인생관과 그림을
뒷받침할 만한 쇼핑(shopping)문화도 실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
전반에 확산되는 추세였다. 젊은 비평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독해’는
물론 해석의 입장과 구별된다. 독해는 기본적으로 언어가 성립되는 최소한의
이항대립의 코드(code)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글쓰기는 자의적이며
그 어떤 해답을 이끌어 내지도 않는다. 따라서 해석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비평이 아니며 본의든 아니든 보다 세련되고 이유있는 ‘용각산
글쓰기’에 해당된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글쓰기를 뒷받침하는 그림그리기의 문제다. 70년대만
하더라도 글쓰기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AG>라든가 <Si>혹은
<오리진>과 같은 그룹활동이 있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들은
발톱이론의 텍스트를 모방 제작하기 위한 공동의 집체노동자들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생산기지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활동은 민중미술이 전면에 부상하던 80년대에 들어와 바닥으로 가라앉았으며
90년대에 들어서자 ‘포스트모던’이라는 새 간판으로 분장한 젊은 세대에게
그 바톤을 내주게된다. 오늘날 ‘용각산 글쓰기’를 뒷받침하는 그림그리기는
적어도 70년대의 상황보다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비교가 안될 만큼,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그럼에도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게임’이라는 시각에서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90년대의 그림그리기도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인문학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닐뿐 더러 그렇다고 우리가
소화시킨 서구적인 인문학의 자양분을 바탕으로 한 그림그리기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80년이후 우리화단은 해외유학파로 지도가 세롭게
그려졌으며 최근의 젊은 비평가들의 소위‘용각산 글쓰기’도 이들의
텍스트를 글쓰기의 주 대상으로 삼고 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되었다.
이들이 외국인은 아니지만 만일 이들을 용병이라고 한다면 우리 화단은
완전히 떡잎이론이나 그 세력은 간곳없고 오직 외국용병만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스포츠에서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미술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않으며 오히려 그 놀이판은 융성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상을 미술문화의 선진화, 세계화라는 미명으로 묵인해야할지
어떨지 냉큼 단언할 수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럴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외제품선호의 사치풍조와 상업주의열기가 이 모든 기우를
단숨에 삼켜버리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발톱이론의 속사정
절망적인 이야기지만
오늘날 미술품은 고급가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경에 이르렀다. 작품에
있어서 해석의 기능이 박탈되는 지경에 이르면 그 그림이나 조각(설치품)은
오브제라는 새로운 조형논리의 세계에서 새로운 시민권을 얻게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우리들 동양인에게 서구식 유토피아(이상사회)를
강요하는 것 만큼이나 생소하고 억지스런 이야기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보면 미술품은 값비싼 장식품 이상의 어떤 다른 의미도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현대미술에서 반회화(反繪畵), 반조각의 양식파괴가 주요한
흐름이고 설치나 이벤트, 비디오아트와 같은 의외의 미술행위가 나타나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미술품의 고급가구화의 운명을 반성하거나 그로부터
탈출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액자와 받침대(조각)가
작품에서 사라질때부터 이미 미술에 있어서 해석의 기능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미술은 실물을 보는 기회보다는
인쇄물이나 TV화면, 혹은 사이버공간에서 보는 기회가 더 많다. 이 말은
오늘의 그림이나 조각, 혹은 그밖의 장르들이 일차적인 공간(응접실,
미술관, 박물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쇄물(화집, 카다로그)이나
TV브라운관, 컴퓨터, 사이버와 같은 이차적인 공간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림이 브라운관이나 사이버 공간에 존재한다면 일찍이 짐벨(Georg Simmel)이
정의했던 액자의 고전적 의미는 사실상 무의미해지는 것이며 따라서
액자는 단순히 그림이 그림임을 강조하는 동어반복의 개념으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짐멜에 의하면 액자는 일상공간(日常空間)으로부터 회화의
이념적인 의미공간을 지켜주는 일종의 감옥의 울타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실제로 그림이 카다로그나 화집속에서 그 해설문과 함께 공존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카다로그나 화집속에 작품이 들어올 때 그 액자는
이미 감옥을 일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격리장치가 아니라 단순히 그림이라는
개념을 보존하기 위한 장식에 불과할 뿐이다. 대부분의 카다로그나 화집에
액자가 없는 그림만이 들어오게 되는 것도 이런 시각으로 보면 우연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카다로그나 화집은 그림이 브라운관이나 사이버공간에
존재할 때처럼 이미 그 작품 본래의 일차적 의미나 기능이 굴절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조각에 있어서 받침대의 이탈이나 설치작업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만든다. 아무튼 미술작품의 이 모든
위상은 발톱으로 그 사자를 안다는 그리스 속담을 무색, 무용하게 만들며,
동시에 비평이 심판관이나 감독이 아니라 해설자이거나 혹은 단순한
해독자이게 만드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필자가 요즈음의
비평을 다시 ‘용각산 글쓰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발톱이론의 이런
속성과 그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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