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매체와 문화예술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문화예술, 혼란스럽지만 새로운 모습의 세대로 나아가는 것

 김승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오늘날 우리는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살고 있다.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폭발적인 증가는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정보의 양은 이전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하였으며, 정보의 질 또한 크게 변화하였다. 위성방송은 전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발생과 동시에 전세계로 전달하며,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민족들의 삶의 모습과 예술은 위성방송을 통하여 서로 나누어 가지게되었다. 이처럼 대중매체의 발달, 정보의 증가, 커뮤니케이션의 증대는 사회의 다른 부분들과 연결되면서 그 속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커뮤니케이션 사회 혹은 대중매체의 사회는 문화예술의 환경을 변화시키며, 문화예술 시장, 향수방법,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변화를 초래한다.

그 외에도 대중매체의 발달은 그 시대의 정치, 경제 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오늘날의 사회를 탈근대 사회라고 말한다. 탈근대 사회와 근대사회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또 어떻게 단절되어 있을까? 근대사회와 탈근대사회를 단절로 볼 수도 있고 연속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근대사회의 여러 측면과 대중매체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사회의 형성에는 대중매체가 큰 기여를 하였으며, 반대로 대중매체는 근대사회의 정치, 경제, 기술발달, 철학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우선 근대적 대중매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술로서 인쇄술이 필요했으며, 신문독자들의 교육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고를 통한 대중매체의 경제적 자립이 대중매체의 존립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배달을 위해서는 교통망이 해결되어야 했고, 뉴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기자들이 양성되어야만 했다. 인쇄매체의 시대를 지나서 전자매체의 시대, 특히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대중매체는 문화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모든 예술 장르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전파되고, 문화예술에 대한 광고, 홍보 역시 대중매체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텔레비전으로서는 매체에 담을 내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 문화예술 장르의 내용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근대시기 이후부터, 민주적 시민사회의 개막과 대중매체라는 기술발달에 힘입어 문화예술의 대중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이전시기에는 소수 귀족들만 누리던 문화예술조차 기술에 의한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대중들이 골고루 누리게 된 것은 문화예술의 민주화와 평등이 이룩된 것이지만,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문화예술의 산업화 상품화는 예술의 규격과, 저질화란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관련된 근대사회와 대중매체는 그 후에도 더욱 밀접한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제 문화예술은 대중매체를 제외하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대중매체 자체가 MTV같은 고유한 문화예술 장르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최근의 문화예술과 대중매체의 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근대사회 속에서 문화예술과 대중매체, 그리고 기술발달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작품의 현존성을 의미한다

 

벤야민은 기술발달과 대중매체, 그리고 이로 인한 예술의 변화를 기술복제로 인한 아우라의 상실로 설명한다. 예술작품이 갖는 아우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즉 그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에서 발생하는 특정한 분위기이다. 아우라 즉 분위기는 대상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말하는 동시에 그 대상을 느끼는 지각작용의 일회적 현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벤야민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듯이 이는 자연적 대상의 분위기 개념으로 더욱 이해하기가 쉽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산이나 나뭇가지의 분위기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어느 볕 좋은 가을날 오후 고요한 산사에 바람이 불어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풍경소리가 들린다면,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머릿속에 사진찍히듯 찍혀 이후 그 산사를 생각할 때마다 그 분위기 전체가 되살아난다면, 이는 그 분위기 즉 아우라를 지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계가 원작을 아무리 똑같이 복제해내도 이 아우라는 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위축되는 대신 복제기술은 복제품을 대량생산함으로써 일회적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서 대치시킨다. 이는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으로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 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복제품의 대량생산과 복제품의 현재화는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것을 마구 뒤흔들어 놓아 원작 혹은 진품의 가치를 희석시키고 (박물관에서의 사진 한 장이면 족하다)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의 또 다른 의미를 낳게 된다.

이렇듯 문화예술작품의 복제와 아우라의 붕괴에는 복제기술이 그 핵심에 존재하고 있지만 대중의 이중적 욕구라는 사회적 조건 또한 배제할 수 없다. 현대의 대중은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오고자 하는 열렬한 욕구를 지닌 동시에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대중은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들을 그림을 통하여, 아니 모사와 복제를 통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 즉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무엇이 이러한 기술을 낳았는지, 무엇이 현대의 대중들로 하여금 그러한 것을 원하게 만들었는지는 또 다른 종류의 논의가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진품의 아우라를 염두에 두고 대량복제로 인한 감수성, 지각작용, 문화예술의 생산과 소비를 말하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진품과 모사품의 구분 자체를 의미 없이 만드는 시뮬라크라, 버츄얼리티, 즉흥성, 일회성, 난무하는 이미지라는 말들이 그야말로 난무하는 시대에 이르면 그것이 무엇의 변화인지, 즉 무엇이 문화예술의 의미를, 심미적 감수성을 변화시키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문화예술을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흔히 하고 있는 설명방식은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감성을 낳고 문화예술의 내용이나 의미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인간의 삶의 조건이 변화했고 따라서 삶을 이루는 것들에 대한 지각의 방식이 변화했다고 하는 것이 더욱 포괄적이고 기본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 또한 이러한 종류의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인을 자본주의 축적양식의 변화로 보고, 특히 축적양식이 시간과 공간을 압축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됨에 따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관계의 변화가 이러한 심미적 감수성의 변화를 낳았다고 본다.

자본주의 축적양식의 변화는 자본의 위기해결 방식이고 이 해결방식은 주로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적 생활의 시공간 감각을 급격하게 재조정하게 하고 한 장소의 사건은 다른 장소로 급격히 전달되며 개인의 경험들은 예술적 소재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들이 예술의 변화를 가져온다. 철도, 통신, 자동차 여행 등이 시간을 통한 공간의 괴멸 즉 확산을 의미하는 근대성에 토대를 이루고 이러한 물적 토대를 경험하고 사유하는 양식인 모더니즘을 낳았다면, 컴퓨니케이션 즉 위성방송을 통한 텔레비전 생중계와 전세계 네트워크의 발달은 확산된 공간의 동시적 운용이라는 탈근대적인 조건을 이루는 기술적 토대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이러한 새로운 기술을 통한 급격한 시공압축이 의미하는 바는 가속화 speed­up 즉 자본회전의 가속화, 생산 소비 교환의 가속화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경직된 포디즘적 체계에서 포디즘­케인즈주의의 불투명성에 대한 해결책으로 회전시간을 가속화시키는 유연한 축적양식으로 변화한 것인데 이러한 생산조직의 분리 운용은 새로운 전자제어 기술과 네트워크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생산양식은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변화 가져와…

 

생산양식의 변화에 따른 소비부분의 변화는 특히 두 가지가 부각된다. 그 첫째는 대중시장에서 패션의 동원이 의류, 장신구, 장식품에서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생활방식과 여가활동들 즉 레저 및 스포츠 양태들, 팝뮤직 스타일, 비디오게임 및 아동용 게임 등에서도 소비속도를 가속화시키는 수단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경향은 재화의 소비에서 서비스의 소비로 이동한 것인데 서비스로의 변화의 의미 또한 그 수명이 재화의 소비보다 훨씬 짧다는 것이다. 빠른 회전에 대한 자본의 요청으로 인해 1960년대 중반 무렵 이후 다수의 문화생산 부문들에도 자본주의가 급속히 침투하게 된다.

자본회전 시간의 가속화라는 탈근대적인 조건은 탈근대적 사고방식, 정서, 생활양식을 낳는다. 가장 큰 특징은 즉흥성과 순간성이 강조된다는 것으로 가령 인스턴트나 패스트푸드 형태의 식사등 상품소비의 즉시성과 함께 (일회용) 컵, 포장, 냅킨 등의 처분성이 가치있는 미덕으로 강조된다. 앨빈 토플러의 말대로라면 이는 사물의 일회용에 그치지 않고 가치나 생활양식, 안정적 관계, 애정, 그리고 기존의 행동양식 존재양식들이 일회적으로 폐기처분 되는 일회용 사회에 살게된 것이다. 이와 함께 즉흥성이 증가되어 장기적인 계획에 참여하는 것은 어렵게 되고 사회적 공감대의 균열, 가치의 다양화, 감각적 과부하 등은 제임슨이 묘사한 일종의 정신분열증적 상태를 낳는다.

인간이 새로운 생산양식 즉 가속화, 빠른 회전, 순간성, 즉흥성 등의 조건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은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변화 (문화예술 자체의 성격변화이든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의 변화이든 새로운 매체와 그것의 내용의 변화이든)가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그 변화는 이러한 조건의 변화와 이에 따른 생활양식 및 정서의 변화와 긴밀하게 네트워킹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떠오르는 것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자본에서도 문화적 실천에서도 중요하게 부각된다는 것이다. 탈근대적 조건이 만들어낸 즉흥성이라는 특징은 그러한 즉흥성의 생산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거나 개입하기 위해 취향과 의견의 조작을 요구한다. 이것은 패션 주도자가 됨으로써, 또는 시장을 이미지들로 포화시켜 즉흥성을 특정한 목적에 맞게 만들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새로운 기호체계와 이미지를 창출하며 탈근대 조건의 중요한 측면을 이룬다. 특히 광고와 미디어 이미지는 문화적 실천에서 중요한 통합의 역할을 맡게 되고 자본주의의 성장동학에서 보다 큰 중요성을 차지하게 된다. 더욱이 광고는 일상적 의미에서의 홍보나 판매촉진보다는 점차 판매되는 상품과는 관련 없는 이미지들을 통해 욕망과 기호를 조작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 그 자체가 상품화되기도 한다. 이미지 상품은 사실상 매우 짧은 소비자 회전시간을 지니기 때문에 자본축적의 입장에서는 과잉축적을 해소할 가장 좋은 상품이기도 하다.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순간성과 즉시 통신의 가능성이라는 기술적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미디어 이미지는 이미지이자 상품으로 생산되고 또 소비되는 것이다.

이미지 사회에서의 아우라

 

이미지 사회의 도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시뮬라크라simulacra의 역할을 보다 분명하게 해준다. 이미지는 이제 원본/대상/실체를 복제/모사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미지는 메이킹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이것이 제기하는 문제는 본질적인 것이다. 시뮬라크라는 모조품과 진품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복제한 상태를 뜻한다. 문제는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에 진품과 복제품을 구별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탈근대적 조건에서 아우라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던한 단계에서까지는 비록 문화예술이 시장원칙에 묶여 있었지만 예술가들은 항상 자신들의 예술작품에 아우라를 부여하려 애써왔다. 모더니즘 예술, 순수예술 등으로 차별화 시키고자 했던 것이 그것이다. 일상생활의 영역과 문화예술의 영역을 끊임없이 차별화 하려는 태도가 모던한 것이라면 동시에 모든 곳에 과도한 이미지가 넘나드는 조건 속에서 둘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 탈근대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고이미지는 점점 더 예술적으로 되어 가고 예술작품은 점점 더 광고처럼 되어간다는 말이다. 사실 매일 접하는 무수한 이미지들은 뇌리에 각인될 여유도 없이 지나가기 때문에 그것들의 아우라를 발견하기 위해 성찰할 시간은 없게 마련이고 이것이 개인이 이러한 조건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이는 비단 미적 대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정체성 자체도 점차 이미지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는 곧 정체성들의 연속적이고도 순환적인 복제가 실제로 가능해지고 또 실제로 문제가 됨을 의미한다. 나와 똑같은 복제인간이 만들어질 경우의 문제는 어느 것이 진짜 나인지 모르게 된다는 따라서 나라는 고유한 존재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의 모습인지, 어느 것이 진품인지, 어느 것이 실체이고 어느 것이 가상적인 이미지인지에 대한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이렇게 보면 표피적이고 저렇게 보면 신화적인 지각 혹은 인식의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문화생산 영역은 이제 그 자신이 시장논리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 상품과 작품의 구분에 더 이상 매달리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생산자, 저자, 예술가라는 아우라는 이제 불필요하다. 탈근대의 스펙타클 사회에서 문화생산자는 텔레비전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 기술을 사용하여 팝 이미지를 만들어서 그들이 그토록 고수하고자 했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간격을 메우고 있다.

이러한 인식방식은 통일된 자아와 잘 정돈되어 있는 세계라는 전제하에서의 선형적이고 논리적인 근대적 인식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조건이 그렇게 변화한 것이다. 데리다는 꼴라쥬, 몽따쥬가 탈근대적인 담론의 일차적인 형태라고 여긴다. 일차적인 문화매체라 할 수 있는 텔레비전을 예로 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텔레비전은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벌어지는 현상들을 그들간의 어떠한 인과적인 연결 없이 그 이미지들만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참혹한 아프리카의 기아와 미국대통령의 스캔들과 헐리우드 스타의 화려함 등이 전혀 불편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잔혹한 살인사건을 보도하고 추석을 잘 보내라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것이 텔레비전 뉴스이다. 위성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을 이러한 방식으로 보고 느낀다. 이렇게 꼴라쥬된 이미지들은 매일매일 시시각각 내보내진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파악할 수도 없고 따라서 파악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전체적인 이미지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한다. 따라서 뿌리보다는 껍데기, 심도 깊은 작업보다는 꼴라쥬, 마구 뒤얽힌채 인용되는 이미지, 시간과 공간이 무너지는 느낌 등이 텔레비전적인 내용이자 방식이다. 텔레비전의 이러한 특징은 맥루한식으로 말하면 쿨한 것이고 텔레비전을 지각하는 방식은 촉각적 혹은 공감각적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모습의 문화예술의 시대로 나아간다

 

오늘날 텔레비전의 특징이 집약되어 있는 MTV(Music Television)는 텔레비전의 고유한 예술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MTV가 포스트모던한 문화양식으로 많은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그 안에 꼴라쥬적인 텔레비전의 극대화된 특징이 예술적으로 포장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MTV속에는 커뮤니케이션의 황홀경이 있고, 환상과 욕망, 시간과 공간의 정신분열증적 타락과 음란, 외설과 꼴라쥬와 조각난 영상의 파편이 있다. MTV에서 우리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묻지 않고 “이것은 무엇을 하는가?”라고 묻는다. MTV는 하나의 정신분열증적 시뮬라크라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하여 다른 대중문화를 흉내낸다. MTV는 이들을 흉내내면서 기존의 대중문화의 진위성에 대한 언급 없이 자기자신의 존재물 즉 시뮬라크라를 만들어간다. MTV의 창의성이란 몽타쥬, 꼴라쥬, 인용 등에서 나온 현시적 효과에 있다. MTV 세계는 현실원칙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포기한다. 따라서 MTV의 세계에서 원본과 복사본의 지위는 동일하며 예술가의 창의성을 위한 향수는 사라지고 없다. MTV는 현실의 질서를 허물어뜨리며 모더니스트들의 아우라를 파괴한다.

MTV의 영상은 매우 빠르고 현란하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현실과 환상이 공존한다. 따라서 거기서 어떤 일관된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다. MTV를 저항적인 문화양식이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MTV의 시뮬라크라적 특징 다시 말해서 MTV가 많은 근대적 이분법들을 해체하고 ‘의미’에 대한 어떠한 진지한 추구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MTV의 모태는 자본주의 그 자체이다. 애초에 MTV는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발생했고 소비주의를 등에 업고 뿌리내려 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떤 감수성의 변화나 문화예술상의 변화를 그 자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MTV 혹은 탈근대적인 감수성이 기존의 자본주의적 질서나 이데올로기에는 저항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동인이 자본주의 자체의 변형이라면 이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질서가 뿌리내리는 것을 오히려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의 논리가 자본의 논리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얽혀있다면 그러한 조건을 반영하는 새로움 혹은 변화를 들떠 맞이하는 태도는 다분히 자기만족적인 것이 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시대는 이전의 사회와는 다른 여러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예술의 생산과 향수에도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제까지 문화예술과 생활의 바탕이 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점차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된다. 문화예술은 더욱 후기자본주의 운용법칙에 흡수되어 사물화, 상품화의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될 것이다. 위성방송의 발달 때문에 이런 새로운 문화 예술적 취향이 제국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도 부정 할 수 없다. 또한 문화예술의 생산방식도 후기­포디즘의 방식으로 변화되어, 문화예술의 생산에 종사하는 문화예술 생산인들의 삶의 조건이 크게 변하게된다. 이런 변화는 문화예술 소비자들의 정서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발생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 폭발적인 시대의 인간상은 가히 정신분열적이라고 할만하다. 그러한 특성을 가진 대중들이 원하는 문화예술이 시장논리에 의해 규정지어진다면,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문화예술은 표피적이며, 깊이가 없고, 일회적이며, 쾌락적이며, 감정적이다. 그러나 근대적 시각의 문화예술이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혼란스럽지만 새로운 모습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