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평론/ 평론의 본질을 말한다. 2 문학

최근 비평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권성우(문학비평가, 동덕여대교수)

이시대 비평의 새로운 모색

‘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적어도 비평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 근원적이며 진지한 관심을 가진 비평가라면, 지속적으로 던질 수밖에 없는 중요한 화두일 것이다. 특히 최근 2~3년은 기존의 비평문학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흐름이 전개되면서, 진정한 열린 비평에 대한 모색과 갈망이 분출하는 문제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최근에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몇몇 비평적 현안에 대한 내 생각을 개진하는 과정을 통해, 이 시대의 비평 문학의 바람직한 진로에 대해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첫째 실명 비판의 문제, 둘째 메타비평의 문제, 셋째 비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판의 문제 등의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주제들은 일견 서로 독립적인 테마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비평문학과 비평 쓰기를 둘러싼 민감한 테마로서, 제대로 된 비평을 수행하고자 하는 비평가라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소중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 세 가지 문제가 열린 대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때, 항간에 널리 퍼진 <비평의 위기>라는 유행적 담론도 제대로 극복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의미에서, 누구나 비평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최근의 비평적 쟁점에 대해서 진정으로 열린 대화를 수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바로 <비평의 위기>를 말 그대로 입증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위기를 돌파하는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을 것인가?

 

실명 비판에 대해서

 

최근 「현대문학」의 <죽비소리>란이 폐지되면서 비평에 있어서 ‘실명 비판’의 문제가 중요한 논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울러 「문학과사회」 2000년 여름호 <쟁점비평>란에 발표된 권오룡의 평문 ‘권력형 글쓰기에 대하여’ 역시 실명 비판과 연관된 논점을 제공하는 문제적인 글이다.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얘기를 통해 실명 비판의 의미와 필요성을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비판문화의 형성에 그 나름대로 소중한 기여를 했던 <죽비소리>부터 얘기해보자. <죽비소리>의 형태는 참으로 기묘하다. 그것은 실명 비판과 익명 비판의 경계에 서 있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그 달에 <죽비소리>에 참여한 필자들의 명단은 실명으로 밝히지만, 그 논자 각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에 대해서 비평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것이 <죽비소리>의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그 비판의 당사자가 나중에 밝혀져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신경숙의 장편소설「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김호경의 장편소설 「낯선 천국」을 혹독하게 비판한 평자가 나중에 구체적으로 밝혀져서, 그 필자들이 곤욕을 치르는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아직 우리 문화계가 토론과 비판을 통해서 열린 대화를 진행하는 작업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죽비소리>의 이 기묘한 형식은 일종의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죽비소리>가 진정으로 열린 대화와 생산적인 논쟁문화를 지향했다면, 각 작품마다 비판자의 실명을 구체적으로 밝혀서 이후에 열린 논쟁이 가능한 기반을 조성해야 했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 보니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필자를 예단하고 그것을 실제로 확인하는 웃지 못할 과정이 존재했던 것이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발생했던 <죽비소리>의 헤프닝은 이 땅의 현대비평과 비판문화, 토론문화의 봉건성과 후진성을 희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지가 아닐까 싶다.

굳이 <죽비소리>의 형식을 이해하자면, 비판과 문제제기를 감정적으로 수용하거나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아직 뿌리깊게 온존하고 있는 우리 지성계의 풍토에서 과감한 실명 비판이 야기할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 강준만의 「인물과사상」이나 「아웃사이더」 같은 잡지의 문제제기에 의해 실명 비판 문화가 정착되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 그리고 문학비평계에서도 「비평과 전망」을 중심으로 한 몇몇 젊은 비평가들이 자발적으로 실명 비판의 문화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히 실명 비판이 요구되는 대목에서 애매한 익명 비판을 고집하는 것은 퇴행적이며 비겁한 논리라고 보인다. 이제 열린 대화와 생산적인 논쟁을 전개하고자 하는 논자라면, 실명 비판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판이 제대로 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은 그 비판이라는 행위에 모든 것을 걸었을 때, 그러니까 자신의 이름과 자존심을 걸고서 비판 행위에 참여했을 때일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실명 비판을 통해서 비판의 대상이 된 당사자와 비판자는 열린 논쟁을 통한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한계를 스스로 갱신해나가는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비판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애매한 일반론을 통해서 비판을 전개하는 것은 비판의 논리 자체가 허약하다는 인상을 주며, 비판의 대상자들에게도 불쾌감만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권오룡의 「권력형 글쓰기에 대하여」1)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무의미한 비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 비평계의 중요한 쟁점을 논하면서, 그가 비판의 당사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단지 우화적 서술을 통해서만 타자들을 제압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폭력적이며 정당하지 않다고 하겠다. 적어도 권오룡이 진정으로 열린 대화를 지향했다면 결코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권오룡의 글은 익명 비판이 보여줄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고스란히 포함하고 있는 비평문이다. 물론 모든 비판에 대해서 실명 비판을 기계적으로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당대 문화계나 비평계의 쟁점이 되는 첨예한 논의에 대해서 비평을 전개한다면, 구체적인 실명 비판을 통해 열린 대화가 오고 갈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판할만한 대상이 없어서 <죽비소리>를 폐지한다는 「현대문학」 측의 주장은 어떤가? 한마디로 이러한 주장은 궁색하게만 들린다. 과연 현재 이 땅의 문학 현실이 비판할 가치조차 없는 작품만이 양산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비판과 문제제기가 필요 없을 만큼 지금 이 시대에 발표되는 작품들이 우수하다는 것인가? 아마도 <죽비소리> 폐지의 진정한 이유는 비판이라는 민감한 행위 자체를 「현대문학」의 편집진들이 지속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예중앙」이 이번 여름호부터 <비판적 서평>란을 신설하여 실명으로 된 장문의 비판적 글쓰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죽비소리>가 지닌 비판 방식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소중한 의지로 파악된다.

우리 비평계는 무엇보다도 논쟁과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전근대적 풍토를 혁신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 없이 타성적으로 발언되는 <비평의 위기>라는 표현은 역으로 그 발언자의 안이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메타비평에 대하여

 

최근 우리 비평계에는 메타비평을 수행하는 젊은 비평가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비평과 전망」동인으로 ‘독백적 담론의 특권화된 해석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의욕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이명원, 고명철, 홍기돈의 비평, 그리고 최근 인터넷 웹진 「대자보」의 특집기획 ‘문학권력과의 열린 대화를 지향한다’에 각기 메타비평을 발표하면서 권오룡과 「문학과사회」를 비판한 전병문, 김기정, 홍기돈 등의 비평이 이러한 흐름에 해당된다. 비평 역시, 문학의 한 장르이며 시나 소설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듯이 비평 자체에 대한 비평도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특히 메타비평 자체가 우리 비평계에서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흐름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메타비평에 대한 관심이 표면적으로는 증가한 것으로 보이는 최근에도 실상 메타비평이 활발하게 전개된다고 볼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논쟁에 대한 회피 심리, 그리고 권오룡의 비평에서 여실히 나타나듯이 열린 대화를 거부하는 에콜의 편벽된 논리가 메타비평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장애요인들이다. 계간지가 발간되는 한 분기마다 발표되는 100여 편을 상회하는 비평문 중에서 사실 메타비평에 해당되는 글들은 서너 편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리고 기존의 문예지에서, 민감한 쟁점에 대한 소신 있는 비판을 담은 메타비평의 게재에 부담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보니, 제대로 된 메타비평을 추구하는 몇몇 젊은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매체(「비평과 전망」, 「애지」 「대자보」 등이 이에 해당된다)를 발간하여 힘겹게 메타비평을 수행하는 형국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대에 메타비평을 철저하게 수행한다는 것은 비평적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자처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비평계에서는 이러한 문학적 고투를 통해 발표되는 메타비평의 의미를 노골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경우가 많다(과연 그 의도는 무엇일까?) 이를테면 「문학동네」의 2000년 봄호 좌담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이러한 실례에 해당된다. 이 좌담의 참석자들은 메타비평을 위주로 비평을 전개하는 비평가들을 향해 작품 분석에 소홀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이 보기에 비평은 무엇보다도 작품에 대한 텍스트 분석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원적으로 재검토 되어야 한다.

메타비평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의미를 지닌 글쓰기 양식이다. 작품을 성실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비평이 비평의 한 종류라면, 비평의 문제점과 편향, 비평가의 이데올로기와 행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메타비평 역시 의미 있는 비평의 한 종류인 것이다. 텍스트 분석에 치중하는 비평만을 제대로 된 비평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마치 시나 소설 같은 순수 창작품만 의미 있는 문학이고, 비평은 창작의 시녀에 다름아니라는 저급한 창작우위론과 유사한 발상에 해당된다. 비평이 시나 소설과 비견되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 혹은 독자적인 글쓰기 양식에 해당된다면 메타비평 역시 다양한 비평 방법 중에서 하나의 고유한 비평 장르이자 독특한 비평적 글쓰기에 해당되는 것이다.3) 메타비평을 자신의 고유한 비평가의 길로 선택한 사람에게 왜 작품 중심의 텍스트비평을 수행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비평가에게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유사한 저차원의 질문일 터이다. 메타비평을 수행하는 비평가들이 과연 텍스트 분석 능력이 없어서 메타비평에 열정을 바치는 것일까? 지금 현재 문예지에 발표되는 비평들의 대다수가 텍스트 분석비평이나 해설비평에 해당된다. 비평에 대한 비평인 메타비평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실존에 대한 처절한 해체 없이는 수행하기가 힘든 치명적인 글쓰기이다. 무엇보다도 메타비평은 타자의 비평에 맞서, 주체의 이데올로기과 실존, 사유구조, 세계관을 한결 뚜렷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러한 부담과 어려움을 돌파한 자만이 비로소 메타비평을 올바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비평 자체를 하나의 작품이자 텍스트로 볼 수 있다. 하나의 비평에 대해서 집요하고 성실한 메타비평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텍스트비평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메타비평을 수행하는 비평가는 항상 타자와의 대화를 염두에 두기 때문에, 다른 비평가보다 한층 자기 성찰에 커다란 관심을 둘 수밖에 없으며, 아울러 타자의 비평텍스트와의 대화를 추구하는 것이 메타비평이기에, 적어도 메타비평을 제대로 전개하는 비평가라면 근원적으로 대화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 메타비평에 대한 비판 역시 좀더 구체적이며 열린 대화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비판에 대하여

 

비평이라는 문학 장르가 기본적으로 ‘비판’을 그 주요한 인식론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너무나 명백하고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비평계는 바로 이 비판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고 판단된다. 최근에 이른바 ‘비판적 글쓰기’, 혹은 ‘전투적 글쓰기’를 진행하는 젊은 비평가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 비판적 글쓰기를 수용하는 우리 비평계의 태도는 상당히 완고한 편이다. 이와 연관하여 김병익이 최근 비평문학에 대한 불만을 말하면서 “할퀴는 비평이 너무 많아요. 어떤 작품의 부정적인 측면, 잘못된 측면을 꼬집기 위해서 비평을 한다는 것은 참 무모한 작업이고 낭비적인 일이죠. 그건 의미화가 아니라 의미 파괴 작업인데, 그러한 일은 문화적인 작업이 아니라고 봅니다”4) 라고 언급한 대목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병익의 이러한 지적은 비판적 비평에 대한 원로급 비평가의 생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김병익의 언급은 구체적인 대상을 적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맥락이 모호하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아울러 그가 비판적 글쓰기의 극히 일부만을 가지고 비판적 비평=남의 글쓰기에 대해서 흠집 잡는 비평으로 단순화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일종의 편견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 역시 비평계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면 전혀 다른 입장에서 조망될 수 있다. 현재 문예지에 발표되는 비평문 중에서 과연 비판에 값하는 비평문들이 어느 정도나 될까? 내가 보기에 비판적 글쓰기에 해당되는 비평문들은 아직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여전히, 해설비평, 덕담비평, 텍스트비평이 우리 비평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비판적 비평이나 비판적 글쓰기가 최근 2~3년 사이에 조금씩 그 비중을 넓혀온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해설비평과 덕담비평의 풍토에 익숙한 입장에서 보면 마치 비판적 비평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 그리고 비판적 글쓰기와 비판적 비평도 여러 층위가 있다. 정말 정교하게 씌어진 제대로 된 비판이 있는가 하면, 비판적 열정만을 앞세우면서 감정적으로 씌어진 비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자와의 성실한 대결을 통해 수행되는 ‘비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비판적 글쓰기가 있는가 하면, 다소 주관적 나르시시즘에 함몰된 비판적 글쓰기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병익의 발언은 이러한 비판적 글쓰기의 드넓은 층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비판적 글쓰기를 ‘할퀴는 비평’이라는 감각적인 용어로 오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떤 작품의 부정적인 측면을 얘기하는 글쓰기가 어떻게 그대로 낭비적이며 의미 파괴적인 행위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부정과 비판 없이 어떻게 한 주체가 제대로 된 자기 갱신과 자기 성찰의 계기를 부여받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김병익의 발언은 부정과 비판, 그리고 해체의 소중한 맥락을 무시하는 일방적인 얘기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이러한 얘기가 열린 대화로 이어져 김병익의 발언이 제대로 된 비판에 대한 기대로 이해되려면, 김병익이 겨누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예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슬쩍 지나가듯이 비판적 비평을 폄하하는 이 대목에서 내가 오히려 김병익이 말하는 ‘잘못을 꼬집는 비평’의 부정적인 실례를 보았다면 나만의 생각일까? 비민주적인 문화와 정치권력에 대해서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었던 김병익이 지금 이 시점에서 비판적 글쓰기를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와의 열린 대화가 필요한 것 같다.

김병익의 예를 통해 확인해 보았듯이, 우리의 비평계는 아직도 비판과 논쟁을 수용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편협하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한 열린 대화 없이는 이 시대 비평의 진정한 혁신과 갱신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비판은 한 마디로 말해서, 비판의 대상자에게 근원적인 자기 성찰과 자기 갱신의 기회를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판을 받은 문인은 칭찬과 덕담의 대상이 된 문인보다 한층 성실하게 자아와 대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지금 여기의 문제는 제대로 된 비판을 전개하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지금까지, 이 글은 실명 비판, 메타비평, 비판적 글쓰기와 연관된 잘못된 편견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진정으로 열린 대화에 근거한 비판과 논쟁의 활성화가 비평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주장해 왔다. 열린 대화, 생산적 대화, 논쟁적 사랑, 이러한 아름다운 단어들은 우리 비평가들을 얼마나 가슴 설레게 만들었던가!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지난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즈음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평소에 열린 대화를 강조해 마지않았던 「문학과사회」의 동인 권오룡의 익명 비판은 바로 그러한 열린 대화라는 구호 속에 내장된 심각한 자기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열린 대화는 지속되어야 한다. 그 열린 대화는 앞으로 어떤 집단의 논리나 이념적 선입견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일군의 젊은 비평가들에 의해 진행될 것이다. 새롭게 전개될 그들의 열린 대화를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