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예술인에게 듣는다 - 한국 가요사의 산증인 황문평

이 땅에서 물려받은 소리, 몸 동작 소중하게 가꾸어주었으면

만난사람: 이백천(가용평론가)
만난곳: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시인이 되고 싶었던 유년기
이백천: 황선생님,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국 가요사의 산 증인이시자  어쩌면 영화계까지도 포함에서 한 평생을 현역으로 늘 그 현장을 지켜오신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는 영광을 제가 입게 되었습니다.선생님 오늘 오시는데 지팡이를 집고 오셨어요. 오래되셨나요?

황문평 : 요즘 걷는데 좀 불편을 느끼고 있어요. 특히 계단 오르고 내릴 때가 힘들어요. 보통 같으면 노인우대 무임 전철을 타고도 가는데... 지하철은 계단이 많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거금을 들여 택시 타고 왔습니다.

: 그런 줄 모르고. 선생님을 이곳(문예진흥원)까지 와주십사고 한 것 죄송합니다. 말씀하시는 데는 지장 없으시겠죠, 금년 연세가 80이 되신다고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 1920년 생이니까, 꼭 80이 되었지요.

: 평소 제가 궁금해 하던 것부터 몇 가지 여쭈면서 “원로 예술인에게 듣는다”를 풀어나갈까 합니다.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것은 언제부턴가요?황 : 23세 때, 그러니까 1943년이지요.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서부터입니다. 자랄 때는 클래식 음악을 하시는 안기영 선생 집안과 가까워서 음악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고, 바흐의 평균율 같은 음악을 알게됐고. 역시 자주 찾아가던 동네 선교사 집에서 새로운 곡들을 듣게 되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슈베르트의 가곡이었어요.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가 바로 일제말기였는데 지금 같으면 ‘싱어롱’이라 할 수 있는 국민개창 운동을 위한 이동 연예대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서 노래 지도원으로 뽑혀 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었지요. 압록강변, 두만강변까지 찾아다니면서 판을 벌였어요.

한번은 현장까지 일본 프로 잡기 기자 한 분이 따라와서 보고는 칭찬이 대단했어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말하는 일본어가 나마리(사투리)없는 본격적인 달변가 풍이라는 거예요.

: 잠깐만요. 말씀을 듣다보니, 일제 말기 선생님이 하신 일이 친일파로 낙인되면 어쩌나 걱정 안될 수 없는데 지금 하신 말씀 그냥 나가도 되겠어요?황 : 그래서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나가 자술서까지 썼지요. 나는 친일한게 아니다. 나는 그때, 관에서 내준 ‘기예증’을 받고 국민개창운동, 일본애국가나 국민가요를 가르치는 지도자로 일한 것 뿐이다. 그때의 모든 젊은이는 관의 명령하에 군대로 가거나, 징용되어 공장에 가거나, 무엇이든 시키는 일을 해야만 했었다고 사정을 밝혔지요.

아무튼, 1943년 당시 오사카 음악학교를 졸업한 나는 그때의 일이 계기가 되어서 소위 딴따라를 하게 된 거지요.

: 선생님 유년, 소년기는 어떠셨어요?황 : 원래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요. 그 당시 우리 글로 된 잡지는 접하기 어려워서 일본어로 된 「소년구락부」, 「아이생활」같은 잡지를 탐독했지요. 집안에 누님들이 계셨고, 아버님이 목사님이시라 찬송가는 늘 곁에 있었고. 고급스럽던(그 당시로서는) ‘언덕 위의 집(홈 온 더 레인지)’이라든가 포스터 멜로디 같은 것에도 친숙했지요. 안기영 선생 말고 지금은 작고하신 작곡가 나운영씨도 같은 동네 친구였지요. 그 사람은 중앙고보, 나는 배재고보였지요.

: 시인이 되고 싶어하신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황 : 43년도에 「조광(朝光)」이라는 잡지에 ‘묘향산 보현사’라는 시를 써서 투고했었는데 당선하기도 했었지요. 그래서 재차 용기를 얻어서 ‘떨어진 능금’이라는 시를 또 투고했는데, 그것도 당선이 되고... 세 번 당선이 되면 시인의 자격을 얻게 되는데, 그 잡지가 전쟁말기에 폐간이 되었어요.

 

대중가요의 아웃사이더이 : 그때 그 잡지가 폐간되지 않았다면 시인도 되셨겠군요. 참 아깝네요. 선생님, 제가 자주 듣게되는 일본인 작곡가 중에서 “고가 마사오(古賀政夫)”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분이 서울선린상업학교 출신으로 일본으로 돌아가 대 작곡가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분의 음악 정서의 뿌리가 한국사람들의 시장 술집 노래판 가락에서 크게 영향받아서 그렇게 일본 전국민이 칭송하는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맞습니까?황 :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 분이 선린상업학교 학생시절, 만돌린을 연주했었지요. 그 분의 음악은 순수 일본음계 위에 쓰여진 음악이지 우리 정서와는 아주 거리가 있는 음악이에요. 한 번 한국을 다시 다녀간 일이 있는데, 외교적인 인사치레로 그렇게 얘기한 것이죠. 그런 얘기가 겹쳐져서 “한국이 일본 엔카의 원류다”하는 말이 나오기도 하나본데, 우리 민요하고는 거리가 먼 음악이에요. 그 분이 ‘궁상각치우’를 공부한 적이 없어요. 채규엽씨가 우리말로 가사를 바꿔 녹음하기도 한 「사케와 나마다카 다메이키까(술은 눈물이냐, 한숨이냐)」가 그 분의 곡인데 한때 퍽 유행했던 곡이지요. 내 귀에 원래 찬송가가 익혀져 있어서 그런지, ‘샤미센(일본의 전통 3현 악기)’ 소리가 들리는 저쪽 음악에 반발심이 무의식중에 생겨요. 일본 토속적 대중 전통음악에 ‘미야꼬 부시’라는 것이 있지요. 일본만이 갖는 음계지요. ‘대니 보이’가 레코드로 나오고, 그 노래에 반해서 그 노래를 열심히 배우고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를 부르고 하던 나에게는 애당초 ‘미야꼬 부시’가 안 맞았죠.

: 일본의 대중노래도 한때 그 토속성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인 때가 있지 않았나요?황 : 가부키에서의 ‘신파조’라든가 대학생들의 교내 기숙사의 노래 ‘료오카’, 또는 소위 현실 도피적인 ‘데칸쇼 부시(메김 소리)’라는 그 전에 없던 가락들이 생겨났지요.

매일 하던 사랑, 짝사랑 타령의 노래에서 벗어나 명치시대의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 명치유신에 반항하면서 인텔리들이 받아들인 ‘데칸쇼 부시’는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등 서구철학자들 이름의 머리 글자를 모아서 붙인 이름인데, 인텔리로서의 긍지를 앞세우면서 이러한 철학자를 모른다면 우리하곤 상대가 안 된다고 하면서, 쟝자끄 루소의 민약론 같은 것에 영향을 받아 당시의 체제를 비판하고 탄압에 항거한 노래였지요.

이야기가 조금 바뀌는데, 지금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일본에 「곤지키 야샤」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번안되어 나온 곡이지요.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이로다...” 하는 노래가 어쩌면 대중들로 하여금 유행가를 부르게 한 시초의 새로운 감각의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엔카’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싣고 나선 곡으로는 극단 예술좌가 내놓은 ‘카츄샤의 노래’를 지목할 수도 있고요. (나카야마신페이작곡‘中山普平’)이 : 일본에서는 토속노래도 있었고, 새로운 물결을 탄 새 음악도 대중가요 분야에서 생겨난 것 같은데, 선생님 젊으셨을 때 들으신 우리 곡 중에서 이것은 일본 것도 아니고, 서구적이지도 않은 이 곡이야말로 우리의 토착적 정서를 느끼게 해주는 곡이라고 꼽으실 수 있는 곡이 있다면 어떤 곡이 되겠습니까?황 : 글쎄요. 얘기하자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라든가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같은 곡이 아닐까요. 세 음으로 된 동요 풍의 노래로 계몽시대의 소박함이 느껴지는 곡이지만, 어딘가 향가적인 느낌이 강하게 “우리 것”을 표출한 곡이지요.

내 기억에 아무래도 외국의 영향을 안 받은 곡이라고 하면 대중가요 분야에선 드물고, 국악 쪽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선생님은 대중음악의 산 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주무대는 영화 쪽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지요.

: 나는 영화음악을 약 250편에서 300편 가량 썼는데, 내 음악에 가요라고 이름 붙일만한 곡은 하나도 없어요. 내가 쓴 드라마 주제가나 영화주제가는 모두 대중가요가 아니지요. 어떤 때는 문화공보부가 권유하는 건전가요 풍의 노래를 만들었어도, 대중가요는 안 만들었어요.

: 대중가요 한복판에 서 계시는 선생님을 계속 연상했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의식적으로 대중가요계를 좀 비켜서서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 나는 아웃사이더였어요. 나는 아웃사이더이기를 자청했었어요. 뭐, 나까지 일본식 가요 찌꺼기를 풀어내는 데 앞장 설 것은 없겠다고 생각했었지요.

: 그렇게 강하게 우리의 가요에 대한 일본가요의 영향을 혐오하시는 것이 두 나라가 공유하는 대중문화상의 어떤 공통 감성분야까지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게 “일본풍토”가 일본대중에게 심어준 “심성”을 안 보려고 하다가 1300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의 문화성까지도 지워버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요? (결례를 무릅쓰고 감히 말씀드렸는데..)황 : 동양문화권 안에서 한일문화, 예를 들어 백제문화라든가, 신라문화, 나라문화, 아스카문화 등 역사적 배경을 놓고 얘기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는 줄은 알고 있어요. 장혁주 같은 작가는 가야 일본 속국 설을 번복하기도 했지만. 양국이 펜타토닉 스케일(5음계)에 예속되어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난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몰라요.

 

한국적 소리의 특색을 갖춰야이 : 선생님. 결례했습니다.

선생님께선 어쩌면 일본음악과 중국음악에도 연관이 깊으신데, 동양 3국을 놓고 대중차원의 음악을 말씀해 주시지요.

지금의 음악 지망생들이 앞으로 진출할 국제시장을 놓고 어떻게 해야할지 도움말씀도 겸해서요.

황 : 내 영화음악 주제가 ‘빨간마후라’를 중국어로 대만 오케스트라에 실어 녹음하기도 했고, 우리 독립군의 활동을 담은 중국영화 「양쯔강」에 내가 작곡한 ‘유유청청’이라는 곡을 박재란이 부르게 한 일이 있는데, 중국엔 ‘마이너 키(단조)’가 없어요. 모두 ‘메이저 키(장음계)’예요. 박자도 4박자지, 3박자가 없어요. 3박자 음악이 드물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지요. 일본의 음악학자 ‘고이즈미 후미오’(小泉文夫)씨가 자주 하는 얘기지만 기마민족의 후예라야 3박자 계의 음악을 소화할 수 있다는 거지요. 따가닥 따가닥... 뚜벅 뚜벅, 두발을 교대로 걷는 2박자 보다 기마민족은 한 박자가 더 붙는데, 공중에 떠오른 순간도 한 박자를 차지한다는 거죠. 따가닥 따가닥... 세계의 삼박자 계보는 몽고, 아프리카 등에서 볼 수 있고, 유럽의 요한 스트라우스 월츠도 3박자이긴 하지만 인위적이라고 지적하고 있지요.

음계를 볼 때, 중국에 단조가 없다는 것은 퍽 특이한 일이죠. 그만큼 중국이 일본이나 한국보다 유럽에 더 가깝게 자리잡고 있는 탓이 아닐까...

문제는 한국적 소리의 특색이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하지요. 장개석 총통시절의 대만에서의 얘기인데, 녹음기사가 나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너희들을 존경한다. 너희들은 애국심도 강하고, 반공정신도 투철하고, 인구는 4000만 밖에 안 되는데, 대학생들이 관에 대항해서 데모하는 것을 봤다. 대단한 용기인데, 혹시 그것 관제데모 아니냐?”, “대만에도 R.O.T.C가 있고, 공산주의와 대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여기선 데모라는 것은 생각도 못한다. 너희들은 가상하다”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다. 일제시대엔 항일운동에 열중했고 배일사상에도 투철했었다”고 자랑했더니, 그의 얘기가 “그런데 너희 나라 가요를 방송으로 들어봤더니 아리랑, 도라지 같은 민요를 빼고는 당신네 나라 노래는 일본과 똑같애. 어떻게 된 거냐?”내가 생각해도 그 중국 녹음기사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지요.

일본과도 또 다른 우리노래, 참 큰일입니다. 실례가 될 얘긴지는 몰라도 우리 나라 기성작곡가 중에 우리 나라 음계와 일본음계를 식별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유명하신 분인데도 말입니다. 그 분들 생각엔 히트시키는 것만이 문제이지, 음악정서의 국적 같은 것에는 애당초 관심이 없는 것이죠. 언젠가 외국사람에게 우리 투의 곡인 백두산 맘보를 들려주었더니, 리듬만 듣고 맘보가 어째 너희 것이냐 하더군요.

: 한때는 우리에게 없는 것, 외부에서 온 낯선 것에 우리가 열중했던, 아니 최근까지도 그렇게 해온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요즘은 좀 바뀌어지고 있는 점도 눈에 띄지 않으신가요? 최근에 들으신 노래 중에서 이것은 ‘우리 것이다’하는 노래가 있으셨나요?황 : 언젠가 유선 케이블에서 들은 노래인데, 묘하게 단아하면서도 마음에 다가오는 노래가 있더라구요. 종래에 없던 형식의 노래였어요. 힙합도 아니고, 락도 아니고, 가곡이나 국악도 아니고, 물론 팝스타일도 아니었어요. 묘한 젊은 가수들이었는데. 혹시 그게 국악가요라는 장르에서 나온 노래가 아닌가 싶은데, 새로우면서도 공감이 가더군요. 곡목을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겠는데.

: 가끔 놀이 삼아 민요나 창하시는 분들께서 방송에 나오셔서 대중가요를 부르시는데, 그 맛이 특이했고 인상깊었던 것을 기억하게 되는데요. 서구적 멜로디를 우리의 창 스타일로 약간 해석을 달리해서 부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새로운 젊은이들의 시도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군요.

선생님께서는 한평생 음악과 연관된 작업을 계속 해오셨는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국 근대가요사가 90년을 채워가고 있는데, 돌아보실 때 가장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시점을 어느 시기로 보시는지요.

 

한국 근대 가요사의 획을 그은 70년대황 : 70년대가 아닐까요. 포크싱어 그룹들이 등장하던 시절.

60년 대 이전까지는 뽕짝이 주류였는데, 60년대에 보컬팀들이 등장했지요. 봉봉 4중창단, 블루벨즈 4중창단, 쟈니 브라더즈 등 이분들이 단 선율에 하모니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고.

: 그때, 빨간마후라도 대 유행했지요.

: 보컬그룹에 뒤를 이어 포크싱어들이 나올 때쯤, 기타 못 치면 간첩이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지요. 그 음악엔 대화가 있었고 서정이 있었고, 아마츄어리즘에 싱어, 송, 라이터라는 3박자를 갖춘 창작기능까지도 구비한 젊은 그룹들이 등장했지요.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투 코리언즈... 그때 그 시절, 생활양식도 크게 바뀌고 외국에서도 장발, 히피문화가 극성일 때 우리 포크 가수들은 단순히 흉내만이 아닌 창작 가요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죠.

가사가 대화 조로 바뀌고, 반말로 바뀌고. 한대수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창문을 열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하나의 큰 물줄기가 터진 것이죠. 얼마 안 있어 김민기, 양희은 등의 새 목소리들이 나타나면서, 노래의 소재는 눈물, 이별, 슬픔에서 완전히 떠나 현실 비판의 노래들, 결국엔 ‘아침이슬’로 까지 이어지게 되지요.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그것은 아주 큰 변화였습니다.

눈치를 볼 줄 모르는 그 당시의 새 세대. 지금은 대부분 50대에 들어선 장년이 되었지만. 그때의 그분들의 공로는 적지 않아요.

: 물론 그 주변에서 활약하던 분들 중 몇 분을 꼽는다면 배호라든가, 패티김, 이미자, 윤복희, 신중현 씨 같은 분도 같이 어울려서 활동하던 시기도 70년대였지 않습니까? 그때는 비록 젊은 세대이더라도 기성세대의 따뜻한 사랑과 지원을 받던 시절, 공감영역이 전 세대에 걸쳤던 시절이었지요.

: 그 후로 공연형식도 크게 변하지요. 요새는 콘서트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패티김이 처음으로 개인 리사이틀을 시작했고, 제대로 연출가가 붙고, 안무가가 붙고, 음향, 조명에 신경을 쓰고, 가수들의 토크가 점점 늘어나고...

: 일본가요의 영향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하고 학수고대하시던 황선생님의 그때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군요. 선생님께선 한때 공연윤리위원으로 계셨고 여러 일에 관여도 하신 걸로 아는데, 바깥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말씀해 주시죠.

: 한번은 남산에서 날 잡아갔었지요. 왜 반전사상이 담긴 노래를 통과시켰느냐는 거지요. 가수 최양숙의 오빠 최경식씨가 지구레코드 문예부에 있을 때 죤 바에즈의 노래를 심의해서 시장에 풀려나갔는데 어떻게 그런 노래를 패스시켰냐는 거지요. 저는 항의를 했지요. 음악심의위원이 반전사상에까지 간섭해야 하는 거냐고. 그런 일은 안기부에서 직접 잘 살펴서 해야 할 일 아니냐고. 12시까지 취조 받고 왔는데, 그때의 동료작가이자 심의위원이던 김희조 선생도 걱정이 되어서 마중해주던 기억이 있고.

한번은 김민기가 「불꽃」이라는 뮤지컬 대본을 보내왔는데, 보니까 옛날 동요에 새 가사를 붙인 것이었어요. 눈치 안볼 수 없는 시절이었지만 원작가의 양해를 꼭 받아야 한다면서 끝까지 안 잘랐지요. 역시 김민기의 ‘아침이슬’인데 이건 음악적으로 하자가 없어서 난 못 자르겠다며 끝까지 주장했지요. 대학생들이 교정에서 부르는 것은 당신네들 힘으로 해결 할 문제 아니라고 대들기도 했지요. 왜색가요 시비 발단이 된 ‘동백아가씨’ 이야기인데, 모두들 내가 금지에 개입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그 곡이 묶일 때 나는 대만에 나가 있었어요. 방송윤리위원회가 처음 생겨났을 때인데, 그때 이흥열 선생이 위원장이셨고.

사전 심의제도가 생긴 유래는 이래요. 그때 민간방송이 많이 생기니까 발매 후에 방송불가 조치를 받을까봐 업자들이 자진해서 악보와 가사를 가져와서 체크해 달라고 한 것이죠. 문제가 있다면 미리 알고 고치겠다면서,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사전심의제도였어요. 누가 직접 간섭하는데서 심의했던 것은 아니지요. 심의위원 개개인의 양식이 잣대였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개인 음반을 낼까, 생각한 일도 있었지만 레코드 회사 근처에 얼씬도 안 했어요. 오해받을까봐.

 

우리것이 세계적인것 될 수 있다는 생각 가져야…이 : 선생님께선 평소 “가요”라는 단어에 이견을 달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중국에서는 노래를 “창가(唱歌)”라고 하지요. 가요라는 말은 일본사람들이 만든 말이지요. 전시 중인데 “유행가”라는 말은 말 자체가 천하다. 국가 유사시인데, 유행 따위를 국민이 쫓아다녀서야 되겠느냐해서 군부지시 하에 만들어진 진중가요, 애국가요 등에서 유래해서 ‘가요곡’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일본 지식층에서는 가요를 한때 대수롭게 생각 안 했었지만 ‘마쯔 다히라 하키라’ 같은 일본의 클래식 지휘자는 좀 달랐지요. 외국 공연 지휘로 자주 나가 있었는데, 외국에 나가서 가장 고향을 생각게 해주는 것은 가요였다는 것이죠. 미소시루 같은 고향의 맛을 느끼게 했다는 가요라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고, 일본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옮겨 발음하는 것이어서. 나는 쉽게 “노래”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대중이라는 글자도 빼고, 그냥 노래.

: 선생님께선 자칭 아웃사이더라고 하시면서도 가수들을 위해서 큰 일을 해주셨지요.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 말입니다.

: 참 남부끄러웠던 이야기지요. 한때 대중차원의 음악은 차별대우의 대상이었어요.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국내 대중가수에게는 절대 공연기회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도 외국 팝 가수에게는 대관을 해오고 있었지요. 한번은 이미자를 데리고 일본에 가서 공연을 했고, 여러 관객 앞에 나가 인사말을 하는 중에 이미자는 한국의 유명 문화 인사 100명 중에 49번째에 등재된 소중한 분인데, 이번에 고국에 돌아가면 그 콧대 높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무대를 열게된다고. 사전광고를 했지요.

아니나 다를까, 세종문화회관 운영회의에서 논쟁이 벌어졌지요. 안 된다, 된다... 외국 팝 가수는 되고, 국내 국민가수는 안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내가 끝까지 우겨서 89년에 패티김과 이미자가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30주년 공연을 할 수 있었지요.

: 선생님께선 70년대에 가수 이성애를 일본가요계에 데뷔시켜 주셨는데요. 이성애의 인기가 치솟자, 그 곳 매스컴에서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다 라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었는데, 어떤 근거로 일본 엔카가 한국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그쪽에서 하게 된 것인가요? 참 궁금한 얘기라 선생님을 뵈면 꼭 여쭙고 싶었던 얘깁니다.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이성애는 국내에서는 가요 풍의 가수이기보다는 포크나 팝 계열의 가수로 알려져 있었는데 말입니다.

: 이성애의 비브라토 없는 소리와 창법이 그 곳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어필했었지요. 원래 일본사람들의 엔카는 비브라토(소리 떨림)가 심한 편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미국 카펜터즈 풍의 창법으로 약간 허스키하면서 잔잔하게 다가오는 이성애의 노래를 새로운 놀라움으로 받아 들였지요. 그런 풍의 일본가수는 없었을 겁니다. 피부색깔, 용모가 모두 자기네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 공감의 폭이 큰 새 목소리를 맞게 되니까 일본사람들이 소리의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죠. 일본에선 이미 한국계로 알려진 미조라 히바리나 미야꾜 하루미 같은 대가수들이 있었고 이어 패티김, 이미자, 이주랑, 얼마 있다가는 계은숙까지 스타덤에 올려놓게 되는데, 한국계 가수들이 워낙 노래를 잘하니까 그렇게 엔카원류 한국설을 내놓게 되었는지도 모르지요. 풍토적으로 습도가 높은 기후에 길들여진 일본 소리보다는 가을하늘처럼 맑고 높게 퍼지는 한국계 가수들 소리에서 더 마음이 씻겨지는 감동같은 것을 느꼈을지도 모르지요.

일부 일본사람들은 한국을 그다지 높게 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 가수들의 소리나 창법에 시비 거는 사람은 본 일이 없어요.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의 감성적 본질을 이웃 나라 사람들이 더 뚜렷하게 보고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엔카원류는 한국”설을 맨 처음 말하기 시작한 사람은 일본인 작가 “오카노 벤”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때 이성애의 음반회사는 “토시바”였는데 노래의 한 절은 한국말, 한 절은 일본말로 불렀었지요. 그때에 이성애가 “토시바”에 벌어준 금액이 6억 5천만 엔 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좀 바뀌지만, 가수의 이름을 잘못 기재해서 이미자가 여권을 받지못한 사건을 말해야 겠군요. 처음에 일본사람들은 이미자의 이름을 “리 요시코”라고 자기네식 발음으로 호명하고 매스컴에 출연시켰었지요. 일본에서 “오바다 미노루(한국이름 강영철)”라는 일본원로가수가 다시 이미자를 일본에 데려가려 할 때 기재문서에 “리 요시코”라고 쓴 것이 문제가 되어서 여권을 안내 준 일이 있었어요.

그리고, 언젠가 NHK가 김연자를 “기무렌코”로 소개했다가 시청자의 빗발친 항의를 받고는 한국식 발음으로 소개하기로 한 적이 있었지요. 일본PD들이 한국 정부에서 이성애하고 김연자에게 특별훈장을 주어야 할 것이래요. 왜냐고 물으니까, 두 사람 덕분에 한국가수들의 이름이 본국발음으로 소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거죠.

: 세계에서 가장 가까이에 이웃하면서 언어체계나 문화배경도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다른 길을 가려하는 두 나라가 월드컵을 공동 주최하고 문화개방의 일정도 짜놓고 서서히 서로 다가가고 있는데 아직은 우리 쪽에서 일본가요에는 방송이라든가 대형콘서트를 허용하고 있지 않는데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지요.

: 이제는 문화를 산업 차원에서 대해야 하는 시대 아닙니까? 우리 것이 더욱 활발하게 국제시장에 나서려면 외국에 대한 제한을 대범하게 풀어야 하겠지요.

: 지금의 젊은 세대를 위해 한 말씀 해 주세요.

: 우리는 우리의 평범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느낌과 생각들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참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어요. 요즘에는 젊은 가수들이 일본, 동남아, 중국 쪽으로 진출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지요.

’88서울올림픽 기간에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씨가 국내방송에 출연해서 한 말이 생각나요. 한국이 세계에 수출할 것이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리, 또 하나는 춤이라고 하더군요.

외국에서 들어오는 소리나 춤도 좋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물려받은 자신들의 소리와 몸동작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가꾸어 주었으면 합니다. 언젠가 케이블TV에서 보고 들은 우리 국악 서정가요 참 좋았어요. 그리고, 중국에서의 H.O.T의 공연도 좋았고요. 여러분들의 앞날에 대해 나는 걱정 안 합니다.

: 선생님께선 가요계와 영화계의 현역으로 활동하시면서 동시에 여러 권의 책도 내셨는데, 요즘은 어떠한 내용을 저술하고 계신가요?황 : 요즘 쓰고 있는 것은 “노래 변천사”라는 제목으로 갑신정변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의 노래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어요.

: 황문평(黃文平)이라는 선생님 성함은 글을 평이하게 쓰신다해서 붙여진 예명이시고 본명이 따로 있으실 것 같아요.

: 본명은 황해창(黃海昌)이지요. 문평이라는 이름 때문에 글을 많이 쓰게 된 것 같아요.

: 선생님께선 여러 문화조직의 대표일도 하셨는데 한국연예협회, 한국저작권협회, 한국가요평론가협회를 두루 책임지시기도 했는데, 예술원에선 왜 선생님을 안 모시는지 모르겠네요.

: 대중예술 쪽은 딴따라인데. 더군다나 가요계에 관계했다면 누가 거들떠보기나 한답니까? 지금도 영화협회 이사인데, 혹시 영화 쪽으로 하면 통할지 모르겠네요. 예술원은 꽤 보수적이라고 알고 있어요. 금년 7월이 마감이니까, 한번 내볼 까도 생각하지만...허허.

: 긴 시간동안 말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참고 : 황문평 선생님

저서1960년 <가요 40년사>1976년 <노래 따라 세월 따라> - 가요계 야화1980년 <노래 백년사>1982년 <창가에서 팝송> - 일간스포츠 연재했던 것을 묶어서 내놓은 가요 60년사 <어린 꿈의 신화> - 고희기념으로 내놓은 수필과 시집 모음1990년 <가요 평론과 한국연예사>1994년 가요이야기 <돈도 명예도 사랑도>1998년 <삶의 발자국 上下권>2000년 <노래변천사> - 현 집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