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연극 |
자연언어와 연극
안 치 운 (연극평론가) 현대연극은 당연히 정해진 의미의 전달보다는 소리를 강조하는 쪽이다. 배우에게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배우의 몸을 의미를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는 것은 언어의 자의성을 발견하고, 의미를 넘어서서 소리에 이르고자 하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물보다 윗길가는 것 없다. 환경문제는 이제 모든 예술 분야의 코밑으로 다가와 있다. 오래 전부터 많은 작가들이 환경파괴와 환경의 중요함을 글쓰고 있다. 모든 예술가는 자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책인 자연을 읽는 이들이다. 작가의 자연 읽기는 독자의 읽기를 부추겨서 삶과 자연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놓는다. 90년대 이후, 우리 삶을 가장 크게 위협하고 있는 것은 언어오염과 자연파괴일 것이다. 최근에 우리 정부도 영향력이 있는 작가들을 초청해서 태백 황지못에서부터 경북 안동을 거쳐 문경까지 낙동강 상류를 따라 내려가는 ‘자연 생태기행’이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프로그램 밑바닥에는 정부조차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작가들이 작품을 써서 환경사랑 의식을 국민들에게 심어달라는 부탁의 뜻이 담겨있다. 1999년, 아름다운 영월 동강에 댐을 만들겠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을 때 많은 작가들은 시민단체들과 더불어 반대운동에 적극 동참했었다. 그러나 한국연극과 연극인들이 댐건설에 반대했다는 소식은 들은 바가 없다. “비밀의 신비한 암호가 고스란히 오므린 채 기다리고 있는”(훨터 휘트먼, 「풀잎」) 자연과 생태환경의 중요성을 알리려는 공연작품은, 내 기억으로는, 김민기의 「개똥이」(1995), 윤정섭의 「무거운 물」(1998)뿐이다. 시궁창에서도 꽃이 피는 것처럼 환경이 모두 파괴되어도 연극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공연이 끝나면 버리게 되는 무대장치 쓰레기들에 대해서 누가 염려하고 있는가? 나무 한 그루에 못 미치는 공연들은 얼마나 많은가! 죽은 자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연극은 얼마나 많은가!갑자기 우리말의 가치가 줄어들고 있다. 슬며시 교육부는 초등학교부터 영어로 수업을 하겠다고 하고, 부질없이 대학은 졸업할 때 영어시험에 합격해야만 졸업장을 주겠다고 하고, 어떤 신문은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우리도 공용화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장에 근무하는 이들도 영어공부를 해서 토익점수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있고…모두들 영어에 최면에 걸린 듯 하다. 우리말을 뒷전에 놓고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광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주식투자, 인터넷, 벤처…우리 삶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한국 연극과 연극인들이 우리말과 삶의 속도에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 전해들은 바가 없다. 오히려 어린 나이에 영어로 연극하면 영어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어린이 영어연극연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영어의 중요성을 모르지 않지만, 영어를 잘 하기 전에 우리말을 더 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 영어시험을 보아야 한다면 그 이전에 우리말 시험도 보아야 한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영어가 필요한 직책이면 영어 시험을 치러야 하지만, 글을 쓰는 기자나 뉴스와 드라마를 제작하는 텔레비전 연출가들이 영어시험을 치르는 것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연극이 삶의 환경을 무시할 수 없듯이 우리말 사용과 연극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옳고 바른 우리말을 무시한 채 영어 사용을 우선할 때 연극과 연극인들은 당연히 입장을 밝혀야 한다. 연극과 관객, 그리고 세상은 서로를 비추는 존재들이 아닌가. 연극은 관객을 반영하고, 공연은 세상을 반영하여 독자들에게 이 세상을 읽는 책과 같은 존재가 된다. 혼탁한 우리말 사용을 보라.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들의 인터뷰를 잘 들어보면, 옳은 우리말이 거의 드물다. 거리에는 집을 가릴 만한 크기의 간판들이 걸려있고, 글씨 색깔들은 조잡하고 글씨체들은 거칠다. 가게 이름도 예외가 아니다. 한글 어원학 사전 하나 없고, 잘 편집된 인용사전 하나 없는 우리말 환경을 어느 곳에 하소연하겠는가? 삶의 거울이며 사유의 수레바퀴인 우리말은 너무 홀대 당하고 있다. 거친 우리말이 오고가고, 영어가 대접받는 사회에서 한국연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 모두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의 젖과 함께 어머니 나라 말과 글을 배운 것 아닌가? 그 글과 말로 세상과 우리들을 하나로 엮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침가리 혹은 조경동 내가 참 좋아하는 땅이름으로 아침가리가 있다.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6년 전 우연하게 한 친구로부터 아침가리란 터 이름을 듣게 되었다. 그 때까지 아침가리란 곳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에 매혹되어 짐을 꾸려 그곳으로 갔다. 친구의 설명은 매우 간략했다. 강원도 현리로 가 방동리, 진동리로 들어가서 계곡 오른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다리가 나오고 집 한 채가 보이고, 더 올라가면 폐교된 아침가리 분교가 있다는 식이었다. 얼마나 애매한 설명인가? 그래도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아침가리란 단어가 주는 밝음과 맑음이 가본 적이 없는 그 곳에 관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배낭을 메고 혼자 그곳에 갔다. 3시간 정도 걸리는 깊은 계곡 길을 5시간 동안 걸어 그곳에 닿았다. 나는 그 곳에 매혹되었다. 그후로는 틈만 나면 들어갔다 나왔다. 그 기억을 나는 「한국연극의 지형학」(문학과지성사, 1998)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이른 아침부터 밭을 갈아야 하는 곳이라는 말뜻을 지닌 아침가리와 골이 깊은 대골은 산 속의 궁벽했던 살림살이와 함께 땅과 하늘을 가슴에 품는 넉넉함을 짐작하게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곳에서 흙과 나무로 집을 짓고 모여 살았던 이들은 지금은 거의 다 떠났다. 홀로 남은 집들은 이곳에 태(胎)를 묻은 사람들을 기다리다 지쳐 허물어져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밤의 달무리와 계곡의 물소리를 내세우면서 다가오는 봄날은 어느새 눈부시다. 그리고 폐교된 방동초등학교 아침가리분교 터 한 쪽에서 붉은 때찔레꽃의 봉오리들이 활짝 피어오를 때 아침가리는 여름을 맞는다. 그리고도 짬없이 이어지는 가을과 긴 겨울이 있다. 대골에는 약초를 캐면서 사는 한 가족이, 앞쪽 사슴생이골과 뒤쪽 연가리와의 사이 아침가리에는 당귀를 재배하며 밭떼기를 붙이며 사는 세 사람만이 아직도 해질녘 누운 길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사륜구동의 차를 타고 굽이굽이 산허리를 잘라 만든 군사용 작전도로를 따라 오는 이들을 싫어한다. 대신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오는 이들은 따뜻하게 맞이한다. 물 흐르는 깊은 계곡을 거슬러 걸음품을 팔며 와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침가리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오는 이들은 흐르는 물처럼 제 몸을 씻어 내야만 비로소 이 곳에 사는 이들과 만날 수 있다. 아침가리와 대골에 가면 시선이 단순해진다. 그곳 사람들의 단순한 삶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자신도 풍경이 된다. 매혹된 영혼. 자연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준다. 아니 우리들을 그렇게 만든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산이 크면 골이 넓다. 아침가리와 대골의 밤, 이 곳에서는 밭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을 때나 산길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어둠과 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산이 깊고 길이 험하기 때문이다. 어둠이 더 깊어질 대로 깊어지면 밤은 오히려 투명해진다. 이 때 말은 줄어들고,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산이 움직이고 눈짓한다. 산이 내쉰 안개가 밤과 뒤엉킨다. 산의 어둠, 그것은 산에 사는 이들을 아주 단순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한다. 내 곁에 와 나를 휘감아 도는 어둠. 아직도 대골과 아침가리 어둠 속에서는 뒤돌아볼 수조차 없다. 뒤가 날 두렵게 만든다. 어둠은 내 앞 뿐만 아니라 뒤에도 있다. 멀리 숲 속의 반딧불이 하늘의 별처럼 어둠에 빛나는 점하나 찍는다. 불의 터인 부엌의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어둠이 타 들어 가 빛이 된다. 밤새 아궁이에 지핀 군불이 꺼지면 다시 아침이다. 어둠에 갇히면 단순해지는 경험은 극장과 연극이 주어야 하는 경험과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아직 이와 같은 경험을 극장에서 해보지 못했다. 오늘날 연극이 거주하는 극장은 정갈한 장소도 아니고, 어둠이 빛이 되는 장소도 아니고, 관객들에게 견딜 수 없는 불안감과 궁금함을 주는 장소도 아니다. 무대장치와 같은 바위, 물, 나무, 바람, 꽃, 흔들리는 잎사귀, 숲등이 조화로운 계곡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박해진 극장에는 보고 듣는 것들이 주는 울림이 사라져 버렸다. 연극과 극장은 관객들이 더 이상 귀향하는 곳이 아니다.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 갈 때마다 자연과 더불어 연극과 희곡을 떠올리게 되었다. 감동이라는 것, 자꾸만 이곳에 오고 싶은 바를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조화로운 자연과 극장과의 관계, 연극의 역할과 자세에 대하여 사유를 할 수 있었다. 위에 인용한 글은 그런 사유의 소산이고 금세 씌어졌다. 그런데 아침가리를 말하는 이들은 이곳에 살던 이들과 이곳을 기억하는 이들 뿐이다. 행정단위를 말할 때도 조경동이고, 지도책에도 그렇게 표기되어 있다. 아침을 한자어 조(朝)로, 밭을 간다는 뜻을 지닌 가리를 경(耕)으로 바꾸고 동네를 뜻하는 동(洞)을 덧붙였다. 이제는 예전에 비해서 더러 아는 이들이 늘어났지만 아침가리라고 하기보다는 아직도 조경동 계곡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 많다. 아침가리와 조경동을 찾아 지도 위에 점찍으라고 한다면 같은 곳이 된다. 언어에서 의미에 해당되는 지형은 같다. 그러나 소리에 해당되는 아침가리와 조경동은 다르다. 이를 연극과 희곡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조경동 식으로 연극과 희곡을 하고 썼던 것이 아닐까? 아침가리와 조경동이란 이름은 둘 다 한 터를 가리킨다. 아침가리는 글자 그대로 아침에 밭을 갈아야 한다는 것과 아침에 밭을 갈면 끝날 만큼 좁은 터를 암시한다. 조경동은 그런 울림을 지니고 있지 않다.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사는 이들은 아침가리라고 하고 행정 공무원들은 조경동이라고 부르는 울림의 차이이다. 어떤 이름이 먼저인가? 살던 이들이 공무원들이 지은 이름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답은 명확하다. 아침가리라고 해야 한다. 아니 아침가리라는 이름을 되찾아서 발음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들은 지금 의미만을 담을 뿐, 소리를 제외시키는 절반의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의미만 있고, 소리가 없는 삶, 소리만 있고 의미가 없는 삶은 모두 천박하기 이를데 없는 삶들이다. 뼈와 살 가운데 뼈만 있거나 수사에 해당되는 살만 있는 꼴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아침가리는 그 터에 살던 이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긴 이름이다. 예로부터 터 이름은 터를 특징 지우는 환경으로부터 생겨났다. 강과 내가 흐르고, 나무가 많고, 언덕이 있는 것에 따라서 동네 이름이 생겨났다. 구름이 많은 곳에는 당연히 구름재라는 마을 이름이 생긴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런데 구름재도 구름을 운(雲)이라는, 고개를 뜻하는 재를 치(峙)라는 한자어로 바꿔 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 제국주의 지배통치와 한자 영향권 아래에 놓인 이래 이런 경우가 심해졌다. 아직도 우리는 그것을 고쳐 쓰지 못하고 있다. 서울 세검정 부근에 사는 필자는 지명을 말해야 할 경우에 행정적으로 쓰이는 동네이름 대신 안골이란 말을 쓴다. 대개의 경우 듣는 이들은 안골이란 단어로부터 어떤 정감같은 것을 전해 받는다. 그것은 구기동이나 세검정과 같은 한자어로 쓰인 말보다는 안골이 터가 지닌 정서를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희곡언어는 통찰의 언어 고전이나 좋은 희곡이라는 평가를 받은 작품 속의 말들이나, 무대 위 배우에 의해 발화되는 말들은 음성과 의미가 절묘하게 어울린다. 씌어진 말과 들리는 말이 하나로 어울리는 곳이 연극이고, 극장이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말과 글은 기표와 기의가 결합되어 사회적 구속력을 지니게 된다. 연극과 극장의 임무는 말과 글이 지닌 계약을 중요한 것으로 여겨 이 세상을 읽는 것이다. 당대에 씌어진 희곡과 배우는 정해진 약속을 지킨다는 뜻에서 당대 사회의 대표적인 표현행위이고, 언술행위자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배우를 “시대의 축소판이고, 짧은 연대기 for they are the abstracts and brief chronicles”(「햄릿」, 2:2:528) 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배우는 언어의 본질에 그 누구보다도 직접, 먼저 도달한 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배우에게 언어는 단순한 언어소통의 수단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와 의미만을 진술하는 행위가 연기가 아니며, 그렇게 진술하는 것만으로 배우의 몫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기호는 소리를 싣고, 소리는 기호를 싣고 있는데, 배우(의 말)는 소리와 기호가 따로 흩어진 채로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로 모으고, 또한 그것들이 되어야 한다. 배우는 의미와 소리의 결합체일 뿐만 아니라 의미와 소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언어와 연결했을 때 정의할 수 있는 배우의 본질이다. 배우의 역사, 연기론의 역사는 의미와 소리를 구분하고, 그것들이 각기 흩어진 역사라고 해도 좋다. 어떤 때는 소리에, 어떤 때는 의미에 기울었던 역사였다. 그리고 의미와 소리가 반반씩 자리를 차지하는 역사도 있었다. 현대연극은 당연히 정해진 의미의 전달보다는 소리를 강조하는 쪽이다. 배우에게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배우의 몸을 의미를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 것이고, 소리를 강조하는 것은 언어의 자의성을 발견하고, 의미를 넘어서서 소리에 이르고자 하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배우를 인형, 혹은 초인형에 비유하는 것도 그런 시도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쥴리엣」에서 다음과 이를 말하고 있다. 쥴리엣:이름에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장미라 부른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그것의 향기는 변함없이 감미로울 것을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word would smell as sweet:「로미오와 쥴리엣」(2:2:40-48) 이어 쥴리엣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쥴리엣:로미오 역시 로미오란 이름이 아니라도, 그 이름과는 관계없이 본래의 미덕은 그대로 남을 거예요. 로미오 님, 그깟 이름을 버리고 당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이름 대신에 이 몸을 고스란히 가지세요 So Romeo would, were he not Romeo call’d, Retain that dear perfection which he owes, Without that title. Romeo, doff thy name:And for thy name, which is no part of thee, Take all myself!(2:2:40-48) 셰익스피어는 사랑에 빠져 눈을 잃은 이들의 대사를 통하여 언어의 자의성에 대하여 명쾌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미오:그 말대로 당신을 갖겠소. 그렇다면 날 사랑이라 불러주오. 난 거듭난 것이오. 이제부터 난 로미오가 아니오 I take thee at thy word. Call me but love, and I’ll be new baptiz’d:Henceforth I never will be Romeo.(1:2:49-51) 현대연극은 배우의 몸이 의미와 소리를 감당하도록 하는 데, 고정된 언어를 초월해서 무대 위에서 매순간 다양한 언어를 만들어 내도록 이끈다. 현대연극에 대한 파격, 실험과 같은 정의는 대부분 고정된 의미를 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는 소리에 의해서였다. 아르또가 말한 ‘잔혹성’이라는 것도 위험한 소리가 아닌가? 그것은 피흘리고, 가학과 피학이 교차되는 장면이 아니라,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라 지금까지 결코 들리지 않았던 소리이며 질러도 들리지 않는 소리가 아닌가? 베케트 식으로 말하면 ‘흰 목소리(voix blanche)’이다. 소리는 공기의 파장으로 인해 들리는 법인데, 파장이 없는 소리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를 어찌하나? 우리나라에서 잔혹성, 잔혹연극은 소리가 아니라 보여지는 것으로 잘못 여긴다. 목잘린 채 피흘리는 괴기영화처럼. 나는 연극에서 배우, 연출가를 언어학자로 비유하고 싶을 때가 많다. 어떤 배우와 연출가는 공연을 정해진 언어, 문자로 만든다. 그들은 언어를 사물을 담는 기호로, 문자를 언어를 담는 기호라고 여기고 있다. 대개 사실주의를 강조하는 배우와 연출가들은 전자에 기대고 있다. 그들은 언어를 담는 기호를 문자라고 할 때 그것이 기호의 기호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사실주의 연기법은 사물을 담는 기호로서 배우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무대가 일상의 삶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무대장치도 현실을 그대로 복사한다. 무대장치가 배우를 뒷받침할 뿐 배우 앞에 놓이는 법이 없다. 사실주의 연기와 연극은 애매한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현실의 한 부분을 삽질해 간 무대장치와 언어는 변함없는 증거와 같다. 인물이든 무대이든 증거없는 연극은 사실주의 연극이 아니다. 그러나 발화된 문자, 즉 소리는 증거가 없다. 연기처럼 보였다 사라질 뿐이기 때문에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사실주의를 초월하고자 했던 현대연극이 소리에 이끌렸던 것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 연극의 본질을 되찾고 싶었기 때문이고, 언어의 구속력이 아니라 언어의 자의성을 긍정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연극의 다양한 표현은 자의성을 긍정할 때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현대연극은 현대 언어학과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언어의 자의성이란 언어의 계약성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일이었다. 현대연극도 언어의 자의성으로 기울면서 고전 희곡으로 향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짐작해 보라. 배우가 나무라고 말하는 것을. 영어로는 트리(tree), 불어로는 아르브흐(arbre)…현대 연극연출가와 배우들은 보고 듣는 관객들을 구분해서 트리, 아르브흐, 나무라고 하기보다는 아예 나무라는 단어가 주는 계약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숲 속의 나무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있는 나무 같은 색과 모양을 더 강조해야 했고, 그 ‘강조’는 고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자식으로 말하면 정명(正名)이 불가능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라는 단어의 발음은 얼마나 정교하고 복잡한가. 입술의 움직임, 혀의 붙임과 떼놓음, 그 사이로 바깥과 안으로 흘러드는 숨소리는 얼마나 빠르고 분명한가. 한 언어학자가 분석한 ‘나무’라는 발음현상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무란 문자기호, 즉 글말은 매우 복잡한 입 운동과정을 통해 나는 소리를 표기한 것이다. 우선 혀의 끝 부분을 윗니 바로 뒤의 튀어나온 부분(치경,alveolar)에 대고 공기를 코로 내보내면서 나는 소리 즉 n소리와, 성문(聲門)을 활짝 열어서 나는 홀소리 a를 합하여 na라는 발음을 한 다음에, 다시 두 입술을 막았다 떼면서 동시에 공기를 코로 보내어 m소리를 만들어서, 이것을 혀를 입 안쪽으로 높여서 나는 홀소리u와 합하여 mu를 만들어 붙이는 소리이다. 얼마나 복잡한가. 그런데도 우리 인간들, 특히 한국인들은 나무란 기호를 보자마자 자동적으로 이러한 복잡한 입 운동 과정을 단숨에 해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슨 입 운동을 했는지 거의 알아채지도 못한다.”(장영준, 「언어의 비밀」, 한국문화사, 1999, 45쪽) 그렇다. 한국연극과 배우들은 우리말 발음에 관한 이와 같은 명증함을 경험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 탓으로 대다수 사람들은 많은 영화나 연극을 보고 난 후, 배우가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삶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말들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비유는 아니겠지만,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라는 허장강의 말투나, 아니면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신성일의 말투를 흉내내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배우의 허튼 말투를 모방하는 것은 희곡을 쓰는 작가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좋은 글을 쓰지 못했으므로. 좋은 글이란 앞서 말한 것처럼 언어를 통한 삶의 통찰력, 언어와 사물의 자의성에 대한 성찰이 담긴 글이다. 한국연극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주의 연극과 이론은 그 무게만큼이나 삶과 세상에 대한 관찰과 객관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언어를 가지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 남는 것은 인식의 미숙함과 성찰의 남루함이다. 절대적인 것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반성과 성찰이다. 셰익스피어 희곡이 현대연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는 언어의 천재일 뿐만 아니라, 삶과 세상을 들여다 보는 통찰력이 그 누구보다도 깊고 웅대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빛나는 대사와 아름다운 비유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희곡 언어, 배우의 소리언어에 관한 부분만 하더라도 셰익스피어는 명확하게 그것을 논리적으로 아울러 유려한 대사로 말하고 있다. 보라. 철천지 원수집안이었던 관계를 모른 채, 로미오는 쥴리엣에게, 쥴리엣은 로미오에게 사랑에 빠졌다. “모르고 너무 일찍, 알고는 이미 늦었다(Too early seen unknown, and known too late).”(1:5:139)라는 짧은 탄식이 이들의 운명적인 사랑을 갈파하고 있다. 아름다운 그러나 비극적인 이들의 사랑은 알베르 카뮤가 가장 좋아해서 그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앞에 붙어 놓았던 대사인 “오, 사랑이여! 생명이여!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사랑이다 O love! O life! not life, but live in death!”(4:5:58)로 끝난다.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은 삶의 통찰력과 더불어 언어 자의성을 잘 알고 있는 점이다. 현대의 많은 연출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이리저리 고쳐서 오늘의 셰익스피어로 공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모른다. 자연과 언어, 삶과 희곡을 너무 건성으로 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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