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자연으로 돌아가기 |
자기 중심 의식에서
생태의식으로
김 성 곤 (서울대교수)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의 대립 전통적인 서구 형이상학에서 자연(nature)과 문화(culture)는 언제나 대립구도로 존재해왔다. 즉 산업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서구 사회에서 문화는 필연적으로 자연의 정복과 순치를 수반했던 것이다. 특히 대자연의 개척을 통해 나라를 세운 북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문명과 문화는 곧 자연과의 사투 끝에 얻어지는 보상이었다. 이렇게 자연을 복종시키고 지배하면서 문화를 만들어온 서구인들의 태도는 그들의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다. 서양화가들의 그림에는 대체로 인간이 중심이고 자연은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예컨대 르노아르의 한 그림은 자연을 화폭에 담고있는 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밀레의 「만종」도 포커스는 추수기의 들판이 아니라 이삭줍는 아낙네들에게 주어져 있다. 반면, 동양화를 보면 인간은 다만 자연의 일부일 뿐, 자연을 정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서구문명과 서구문화에서 자연은 늘 극복의 대상이었으며 끝없는 착취의 대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와 교양의 산물인 예술작품 역시 자연의 반대편에 서있는 존재로 파악되었다. 서구인들의 이러한 자연관과 테크놀로지의 오용과 남용은 결국 심각한 자연의 훼손과 환경파괴를 초래했다. 그래서 19세기 중반에 미국의 철인 에머슨은 동양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연과의 친화를 주장한 「자연론」을 썼고, 그의 문하생이었던 소로는 문명을 떠나 2년여 동안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월든 숲 속의 생활」을 발표했다. 에머슨과 소로에게 있어서 인간과 문명은 자연의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파괴의 장본인이었고, 당시 등장한 기관차와 증기선은 자연의 정적과 순수성을 훼손하는 기계문명의 상징이었다. 이들이 시작한 자연 친화 운동은 후에 환경운동의 한 중요한 기반을 마련해주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소위 “자연에 대한 글쓰기(nature-writing)”에 그쳤을 뿐, 보다 더 복합적인 환경생태 운동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작가들이 문명비판과 더불어 환경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서구문명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던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예컨대 미국 시인 앨런 긴스버그가 1956년에 발표한 장시 「울부짖음(Howl)」이나 「아메리카(America)」, 또는 그 후에 발표한 「가든 스테이트」나 「전사」나 「지옥의 노래」 등은 서구문명과 미국문화의 병폐, 그리고 그것이 초래한 환경파괴와 생태계 훼손에 대한 시인의 강력한 고발장이었다. 긴스버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미국이여, 우리는 언제나 전쟁을 끝내려는가”(아메리카) “가든 스테이트, 예전엔 농장이 있었고 돌집과 푸른 잔디, 그리고 녹색의 구름이 있었지/또한 목련이 만발했었고, 온갖 꽃들이 마을을 뒤덮었었지/그러자 마피아가 왔다/이윽고 술이, 하이웨이가, 쓰레기가, 그리고 드디어는 2차대전이 오고/프린스턴에서는 아인슈타인이 원자탄 제조실험을 하고 있었다.”(가든 스테이트) “전사는 전장에 나가지 않는다./다만 강제로 징집된 젊은이들만/그곳에서 죽어갈 뿐.” (전사) 위의 시에서 보면, 긴스버그는 1950년대에 벌써 단순한 환경주의를 초월해 복합적인 생태주의로까지 관심의 영역을 확장했던 것처럼 보인다. 전쟁과 원자탄, 그리고 마피아와 술과 쓰레기는 환경뿐 아니라 인간 생태계까지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형적 파괴를 초래하는 것은 물론 인간의 파괴된 정신, 즉 인간 정신 생태계의 파괴다. 긴스버그는 잘못된 정치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편견을 인간 정신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보고, 훼손된 정신 생태계의 회복을 주창했던 20세기의 대 선각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긴스버그는 환경 친화적인 시인이었고, 환경을 넘어서는 예술가였다. 왜냐하면 그의 예술은 자연과 대립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파괴하는 병든 인류문명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스버그의 이러한 예언자적인 비전은 1960년대에 오면 진보주의자들의 반전·반핵·여성해방 운동으로 이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환경 파괴뿐만 아니라 인간 생태계 파괴까지도 수반하는 가장 심각한 범죄행위이며, 핵무기 역시 대자연을 삽시간에 초토화시킬 수 있는 치명적인 파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해방 운동 또한, 여성에 대한 착취와 지배가 곧 자연에 대한 착취와 지배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환경 친화 운동과 생태계 보호 운동으로 확대된다. 그런 면에서 동양사상은 서구인들에게 하나의 신선한 해결책으로 다가왔다. 1950년대와 60년대 서구작가들이 선불교 사상과 노장 사상 등 동양철학과 종교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모택동 사상 같은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에서 병든 서구문명의 치유책을 찾았던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였다. 환경주의와 생태주의의 차이 1950년대 후반 이후, 이렇듯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배경에는 서구문명에 대한 거대한 반성을 불러온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물론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모더니즘 예술이 모두 반자연적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도시와 근대화에 근거해 생성된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의 강령에 자연보호나 환경보호가 들어갈 자리는 많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반면, 탈현대, 탈도시, 탈제국주의, 그리고 탈중심을 주창하며 시작된 포스트모던 인식은 자연스럽게 환경문제와 생태계 문제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켰다. 그렇다면 환경주의와 생태주의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인가. 환경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상황으로써 인간의 행동에 따라 나빠질 수도 있고 노력에 의해 개선될 수도 있다. 그래서 환경주의는 오염된 환경을 과학기술을 이용해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환경주의는 낙관적이다. 반면 생태 또는 생태계는 인간과 자연과 사회가 상호 역동적으로 조화하면서 존재하는 삶의 그물망을 의미하며, 일단 그 현상이 훼손되거나 파괴되면 지구의 생명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상처를 입게된다. 생태주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생태학적 연결망’을 통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데, 만일 그 연결망이 찢어진다면 그 상처의 고통과 파멸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즉 하나가 다치면 모두가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생태주의는 ‘나’와 ‘너’를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내 아픔이 곧 ‘타자’의 아픔이 되고, ‘타자’의 고통이 곧 내 고통이 되기 때문이다. 환경주의가 인간중심주의를 견지하고 과학기술을 신뢰한다면, 생태주의는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다 똑같은 존재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테크놀로지의 오용과 남용을 경계한다. 또 환경주의가 인간의 환경에만 관심을 갖는 반면, 생태주의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환경개선에만 관심이 있는 환경주의와는 달리 생태주의는 복합적인 중층구조를 갖는다. 예컨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연결시키는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주의의 그러한 중층구조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생태학적 학대와 착취 속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학대와 착취를 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생태주의는 인간과 자연과 사회가 서로 갖는 유기적 관계를 복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환경주의보다는 진일보한 사조라고 할 수 있다. 환경주의로부터 보다 더 복합적인 생태주의로의 전이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의 변화는 이미 1970년대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예컨대 조셉 미커는 1972년에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문학에 적용시켜 문학생태학의 가능성을 열었으며, 1974년에 그레고리 베이츤은 인간의 정신 생태계와 자연생태계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인간의 마음 생태계의 파괴를 경고하고, 훼손된 정신 생태계의 회복을 주장했다. 베이츤에 의하면 나치즘 같은 극우 이데올로기나 세계대전 같은 것들도 사실은 인간들의 정신 생태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 생태계의 층과 인간의 정신 생태계의 층이 겹치면서 연결되는 것을 ‘심층 생태학’이라고 부른다. 요즘은 모든 학문분야에 ‘생태’라는 말이 붙어서, 예컨대 생태 정치학, 생태 사회학, 생태 여성학, 생태 문학 등의 용어들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문학분야에서도 문학 생태학, 생태비평, 생태시학, 녹색문화연구, 환경문학비평 같은 말들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새로운 접근법은 자연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위해, 그리고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으며, 또한 예술과 문학이 자연이나 환경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상호보충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생태주의 작가들은 비단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경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파괴를 야기시킨 근원적 이유에 대한 탐색으로까지 관심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를, 선택받지 못한 계층에 대한 선택받은 계층의 지배와 착취와 연결시켜 중층구조와 두 겹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려고 시도한다. 생태주의자들은 이제는 인간본위와 자기위주의 시각을 버리고, 이제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학적 인식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이대로 간다면 인류절멸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말에 자신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타자는 어찌 되던지 자신만 안락하고 자기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다행히도 깨어있는 선각자 작가들은 창작활동을 통해 ? 灌湺?우리들을 깨우쳐주고 있으며, 자연과 문화 사이의 이분법적 대립을 해체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지고하고 순수한 영역에 숨어 은둔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액슬의 성”에서 나와 환경과 생태계의 훼손, 그리고 인간의 정신 생태계 파괴를 경고해주며, 더 나아가 그 근본 원인까지도 탐색해 밝혀주어야만 할 것이다.
문학 생태학과 생태비평 비교적 초창기인 1960년대에 이미 환경·생태학적 상상력으로 탁월한 예술작품을 써내어 문학생태학의 귀감을 보여준 작가가 바로 토머스 핀천이다. 처녀작 「브이를 찾아서」(1963)를 비롯해 「제49호 품목의 경매」(1966), 그리고 ‘전미도서상’을 받은 「중력의 무지개」(1973)에서 핀천은 특유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훌륭한 생태주의 문학을 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브이를 찾아서」에서 핀천은 제국주의 같은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서구문명의 몰락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는 인간의 정신 생태계를 파괴한 그와 같은 것들이 인간들을 인공물로 이루어진 무생물로 변모시켰고 생명을 박탈해갔다고 말한다. 예컨대 「브이를 찾아서」에 등장하는 ‘신부’(아마도 ‘브이’)는 몸 전체가 인공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 다른 등장인물인 에스더는 코에 성형수술을 받는다. 흥미 있는 것은 에스더가 ‘문화적 조화’를 위해 자신의 자연적인 모습을 인공적으로 바꾼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는 실제로 두 명의 인조인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와 같은 장치들은 서구의 제국주의 역사와 맞물려 인류문명의 필연적인 파멸을 예언해주고 있다. 「제49호 품목의 경매」에서 핀천은 인류절멸의 원인을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분법적 사고방식, 그리고 교류의 단절과 타자의 배제에서 찾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에디파 마스는 작품 내내 생태학적 그물망이 찢어진 채 자신만의 밀폐된 의식의 방 속에 갇혀 있다. 핀천은 그녀가 마치 라푼젤처럼 타자와의 교류가 단절된 채 자아의 고립된 탐 속에 갇혀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헛되이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며 모든 것을 0과 1 사이의 이분법적 대립항 속에서만 찾으려고 한다(핀천이 1966년에 이미 컴퓨터의 기본 원리인 0과 1의 패턴을 작품의 모티프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러한 생태학적 모티프를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핀천은 이 소설에서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이론과, 소외된 사람들의 은밀한 지하 우편제도인 트리스테로, 잃어버린 원본 텍스트, 그리고 미국의 유산 탐색이라는 예술적 장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력의 무지개」에서 핀천은 테크놀로지의 오용, 서구의 이성중심주의, 배타적인 청교주의, 그리고 나치즘과 민족주의 등을 인류문명의 절멸을 가속화시키는 부정적 요인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타이론 슬로스롭은 어렸을 때 몸 속에(그것도 성기 속에) 인공물질을 삽입한 사람이다. 그 물질로 인해 그는 원인과 결과 뒤집기를 해내 그러한 현상을 인정할 수 없는 과학자들을 괴롭힌다. 이 소설에서 핀천은 나치즘은 물론, 나치즘에 대항하는 원주민들의 극단적 민족주의 역시 또 하나의 경직된 배타적 이데올로기로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에서 핀천은 문명의 조종과 지배로부터 벗어난 원초적 자연의 신비함을 제3의 기능성으로 존중한다. 중요한 단편인 「엔트로피」에서 핀천은 이 세상 파멸 시에 개인의 안락한 도피나 혼자만의 생존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주인공 칼리스토는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는 안락한 밀실 속에서 지내며 밖의 온도와 관계없이 항시 불변하도록 온도를 맞추어놓지만, 결국 새의 생명을 살리지 못하자 유리창을 깨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한다. 생태계의 그물망이 파손되면 안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생명체는 지구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한편, 아래층의 미트볼은 무질서의 극치를 치우고 정리해서 파멸을 피한다. 핀천은 질서와 무질서의 극치 중 그 어느 것도 구원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이분법적 가치판단을 피하고 제3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추구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자연과 녹색의 목가적 꿈을 상실한 현대문명의 위기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표현한 뛰어난 수작이자, 선구자적 환경·생태 예술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렸을 적 기억을 되살려 송어낚시 여행을 떠나지만, 은빛 송어가 뛰놀던 예전의 하천이 이제는 경직된 나무 계단(세속적 출세를 위한)이 되어버린 것을 발견하고 실망한다. 송어하천을 찾아 헤매는 탐색여행에서 주인공은 오염되어 썩은 하천, 독극물이 뿌려진 하천, 그리고 송어들이 모두 죽어 떠있는 더러운 하천을 발견한다. 그리고 드디어는 클리브랜드 고물상에서 하천을 아예 피트 당 잘라서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천은 오염되고 송어는 사라져서 미국인들은 이제 더 이상 송어낚시를 하지 못한다. 오염된 하천과 파괴된 자연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원인으로 브라우티건은 극우 보수주의, 나치즘, 정부의 감시와 통제, 잘못된 교육제도, 권력자들의 횡포와 억압, 민중의 순응주의와 정신적 마비, 피지배계급의 폭력적 저항, 월남전 같은 전쟁, 그리고 빈자와 소수인종에 대한 편견 등을 들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미국의 송어낚시」는 한편의 훌륭한 생태주의 문학으로 승화한다. 왜냐 하면 이 소설은 인간과 자연과 사회가 상호작용을 통해 공존하는 메카니즘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통해 현대에 필요한 생태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환경보호법이 1969년에야 통과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브라우티건의 이 소설은 환경소설로도 가히 선구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라우티건의 진정한 위대성은 그가 이 소설에서 단순히 잃어버린 자연과 목가주의의 상실을 슬퍼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대인들의 꿈의 상실과 삶의 피폐,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추구 및 탐색, 그리고 예리한 문명비판으로까지 연결시켜 훌륭한 예술적 중층구조를 성취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저자는 작품의 마지막에 ‘황금 펜촉’을 등장시켜, 예술가가 예술적 상상력으로 다시 한번 오염되지 않은 하천과 송어를 되살려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힘을 가진 문학예술이란 결코 저 높은 곳에 존재하는 순수하고 장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황급히 덧붙인다. 그래서 작품의 마지막을 그는 ‘마요네즈’라는 말로--그것도 철자가 틀린 표기로--끝맺는다. 그걸 통해 브라우티건은 ‘예술이란 절대 완벽한 것이 아니며, 또 마치 우리가 일상 먹는 마요네즈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우리의 삶이 샐러드와도 같다면, 거기 얹어져 감칠맛을 내는 마요네즈같은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다. 환경을 넘어서는 예술 지금 환경과 생태학은 지구촌 전체의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으며, 예술 역시 그러한 움직임에 동조하고 있다. 그 동안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사실 너무 방만했고, 자기중심적이었으며, 당연히 걸머져야할 사회적 책임을 회피해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예술은 스스로의 고립을 반성하고, 인류의 생존이 걸려있는 환경문제와 생태계 파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예술이 그 동안 다각도로 삶의 여러 양태들을 조명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술이 다루어온 ‘인간의 조건’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것이었지, 인간의 환경이나 지구의 운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 파괴나 생태계 훼손은 인류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절박한 문제이며, 추상적인 고뇌에 뒤지지 않는 중요한 비중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녹색평론」을 발행하고 있는 평론가에게 대산문학상이 수여된 것은 대단히 의의깊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일군의 국내 작가들이 환경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잇달아 내어놓고 있는 것 역시 고무적이다. 외국의 경우에는 아예 환경문제나 생태계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가들도 있다. 예컨대 프랑스 작가 장 마르크 오베르의 「대나무」(1997)는 대표적인 녹색문학 작품인데, 이 소설에서 대나무 숲은 뿌리들이 수평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생태학적 연결망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 중 어느 하나가 상처를 입으면 다같이 괴로워하고, 어느 하나에 물을 주면 모두가 시원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전체주의적 위험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경우의 공동체의식이란 물론 ‘타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지 결코 개체성을 무시하는 전체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과거 그 어느 때 보다도 “녹색의 회복”에 대한 예술가들의 탐색과 추구가 필요한 시기이다. 개발이란 미명아래 이미 심각하게 파손된 생태계의 보호와 보존, 그리고 목가적 꿈의 회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인식이 바뀌어야만 하는데, 녹색예술은 바로 그러한 의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비오는 날 밤 몰래 강에 폐수를 하천을 오염시키고,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며, 보신과 축재를 위한 밀렵을 계속하고 있다. 또 인간의 생활환경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습지인데, 우리는 간척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여전히 갯벌을 없애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 환경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환경부는 언제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서둘러 발표한다. 마치 환경보호가 아닌 여론 무마가 바로 환경부의 기능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녹색예술의 기능은 더욱 중요해진다. 의식의 전환이 없이는 절대 환경보호나 생태계 보호가 불가능한데, 예술은 바로 그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생명의 존엄성에 근거한 ‘친환경예술’이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