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21세기 문화예술과 영상이미지-총론

인문학이냐 이미지냐의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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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문화예술

 

김 주 환 (연세대 교수)

 

21세기의 문화예술은 이미지 중심의 영상 문화가 주도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과 그래도 문화예술 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여전히 인문학일 것이라는 입장이 대립되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이 두 가지 입장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무슨 양비론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문화예술이 이미지에 의해 주도되는가 아니면 인문학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본다. 이미지나 영상 문화는 결코 인문학을 침식하거나 인문정신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며, 또 인문학이나 인문 정신이 종이 위의 인쇄된 텍스트만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예술적, 역사적, 철학적 탐구이며 인문정신은 그러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삶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자세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반드시 인쇄매체의 하나인 책에 기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넓은 의미에서의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존재했다. 그러나 문자 발명 이전의 문화는 시각 위주의 문화가 아니라 청각, 촉각도 모두 중요한 다중감각적 문화였다.

인문학이냐 이미지냐 하는 식의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나 두 입장 중 하나를 옹호하는 사람 모두 일정한 편협한 오해에 사로잡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화 예술에 있어서의 미디어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문화예술 전반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매체 발전의 역사

인류 역사상 첫번째의 미디어 혁명은 글쓰기 체계(writing system)의 발명이다. 문자의 발명 이후에야 인류는 입말에 대비되는 글말이라는 새로운 언어 양식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기록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집단 기억의 수단을 갖게 되었다. 글이라는 새로운 정보 양식 덕분으로 인류는 선사 시대를 벗어나 비로소 텍스트로 역사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문자의 사용이 인간의 의식과 문화에 얼마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는가를 꼼꼼히 고찰하고 있는 학자는 월터 옹이다. 그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인간의 본성으로 당연히 여기게 된 여러가지 것들이 사실은 글말(literacy)과 글쓰기 체계라는 새로운 기술에서 유래한 것이다. 옹에 따르면, 글쓰기는 단지 인간 의식을 외부에서 도와주는데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의식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또한 글쓰기는 인간 커뮤니케이션에 요구되는 기본적 감각을 청각에서 시각으로 좥영구히좦 바꾸어 놓았다. 옹의 논의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고대 그리스의 입말 문화와 글말 문화를 대비하여 설명하고 있는 하벨로크의 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벨로크는 입말 문화권에 속해 있던 부족적 인간들이 글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부족을 초월한 개인으로 탈바꿈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탈부족적인 개인(detribalized individuals)을 교육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이 바로 이데아라는 개념을 고안해 낸 플라톤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미디어 혁명은 인쇄 매체의 발명이다. 인쇄 매체 등장의 포괄적인 영향력에 대해 본격적인 역사적 고찰을 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아이젠쉬타인에 따르면, 중세 사회를 근대로 이끈 기본적 원동력이 바로 인쇄 매체이다. 인쇄 매체는 라틴어를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 유럽 사회의 소수 엘리트들이 독점했던 자료 저장과 탐색,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의 체계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고 르네상스 혁명을 가져왔다. 당시의 뉴 미디어였던 인쇄 기술은 성경을 각국의 언어로 대량 출판하게 함으로써 중세 교회의 독점적 권위를 와해시키고 프로테스탄트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각국 언어의 표준을 제시함으로써 민족국가 의식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인쇄 매체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불특정 다수인이 동일한 텍스트를 지닐 수 있게 함으로써 객관적 지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바탕을 둔 근대 과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인쇄 매체 이전의 텍스트들은 중세의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손으로 필사함으로써만 생산되었으므로, 판본에 따라 내용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고, 하나의 동일한 텍스트에 기반을 둔 객관적 지식이라는 개념도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종교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 그리고 근대 과학과 민족 국가의 성립도 모두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요즈음 말하는 인문학이나 인문 정신은 바로 이 인쇄매체가 탄생시킨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예컨대 근대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만 하더라도 책의 대량 인쇄 기술과 책 유통 시장이 정비되면서 많은 대중 (reading public)이 생산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도스또예프스키가 혼자서 많은 독자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많은 독자가 생성될 수 있었던 사회-기술적 시장 조건이 도스또예프스키라는 스타 작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100 여년전의 독자들이 무슨 인문정신이 투철하거나 인내심이 많아서 그 두꺼운 죄와 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던 것은 아니다. 텔레비전도, 비디오도, 영화도 없는데 소설책 읽는 것 외에 더 재미있는 일이 뭐가 있었는겠는가? 도스또예프스키가 100 년뒤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우디 알렌 같은 영화 작가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문화 예술에 대한 여러 가지 비평(문학비평, 미술비평, 음악비평 등)이라는 장르 역시 위르겐 하버마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정기 간행물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탄생시킨 장르였다. 정기 간행물(신문, 저널, 잡지 등)이라는 형태의 매체는 규칙성(매일 혹은 매주 출간된다는 것)과 보편적 접근 가능성(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볼 수 있다는 것)이라는 특성 때문에 대중(mass)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어서 이들을 집단적 이성의 소유자인 공중(public)으로 전환시켜 근대 민주주의와 민족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 하버마스, 베네딕트 앤더슨, 앨빈 굴드너 등의 주장이다.

 

세번째의 미디어 혁명은 전자 매체의 발명이다. 맥루한은 글말이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발달시켰으며, 씌어진 텍스트가 인간을 탈부족적인 개인으로 발전시켰다고 본다. 맥루한은 영상과 소리를 동시에 제시해 주는 영상 전자 매체, 특히 텔레비전은 이성적인 개인을 다시 비이성적 부족적 인간들로 퇴화시켰다고 주장한다. 월터 옹 역시 영상 전자 매체가 제2의 입말 문화(secondary oral culture)를 가져왔다고 본다. 시각 기관을 통해 좌에서 우로 순서대로 받아들여지는 텍스트와는 달리, 텔레비전의 시청각 정보는 눈과 귀를 동시에 사용하여 한꺼번에 받아들여지며, 이는 원시 부족사회를 결합시켰던 힘인 터치(touch)의 감각을 되살려, 지구 전체를 하나의 부족 사회인 지구촌(global village)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다.

전자 매체는 또한 인류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의 기록을 남기게 하였다. 문자 이외의 소리와 영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록은 인류의 집단 기억에 새로운 양식을 부여하였다. 임진왜란에 대해 우리는 읽을 수밖에 없지만,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보고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영상 전자 매체는 생중계 방송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하나의 사건을 즉각적인 역사(instant history)로 만들어버리는 위력까지 발휘하고 있다. 인간의 달 착륙 장면이라든지, 시앤앤 텔레비전의 걸프 전쟁 중계 방송 등이 이러한 예에 해당하는데, 커뮤니케이션 학자 엘리후 캣츠와 다니엘 다이안을 이러한 현상을 미디어 이벤트(media events)라 부르고 있다. 하나의 중요 이벤트에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일은 원시 부족사회에서나 가능했던 일인데, 이것이 영상 전자 매체를 통해 전지구적인 규모로 다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전자 매체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 사회를 생산해 낸 대중 매체이다. 물론 인쇄 매체가 대중 매체의 원형인 것은 사실이지만, 씌어진 텍스트의 전달은 문자 해득률 등에 의해 제한될 수밖에 없으며, 항상 소수의 읽는 대중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리와 영상을 전자의 속도로 전송하는 전자 매체들은 이러한 제한 없이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즉각적으로 파고들어 그들 모두를 대중으로 전환시킨다.

영화나 TV, 비디오 등의 매체를 우리는 흔히 이미지 중심의 영상 매체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지와 시각 중심의 문화의 정수는 맥루한이나 하벨로크가 누누히 강조하는 것 처럼 바로 인쇄매체에 기반한 텍스트이다. 오히려 책이야말로 보는 것 위주의 시각 우월주의를 가져온 원흉(?)이다. 영화나 TV, 비디오 등 소위 영상매체와 책이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책은 조용한 반면 영상매체는 시끄럽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영상매체는 소리를 동반한다. 따라서 영상매체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각과 청각에 동시에 작용하는 다중감각 매체인 셈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한 것처럼 이미지의 시대는 오히려 중세이다. 조용한 중세때에는 이미지만이 가득했다. 20세기의 전자 매체의 시대는 오히려 청각 공간이 강조되는 소리로 가득한 시대이다. 인문학은 그동안 이미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를 해왔다. 21세기의 인문학은 이제 소리를 포함한 대중감각에 대해 더 많은 담론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와 문화예술

지금까지 우리는 매체의 발전의 역사가 문화 변동의 기본적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21세기의 대표적 매체는 디지털 미디어다. 문자의 발명이나 인쇄매체, 혹은 전자영상매체의 발명보다 더 큰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는 디지털 미디어의 특성을 잘 살펴보는 것은 21세기의 문화 예술 발전의 기본 방향을 가늠해보고 또 인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정립하는데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의 보편적 확산은 이미지 중심의 문화냐 텍스트 중심의 문화냐의 구별조차 무의미하게 하는 혁명적 변화이다.

인류 역사상 네번째의 미디어 혁명의 결과라 볼 수 있는 디지털 미디어의 특징은 쌍방향의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interactive communication)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과 디지털 정보(digitized information)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으로 미루어 볼 때, 디지털 미디어는 인쇄 매체나 전자 매체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인간의 의식 구조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인간의 시청각을 모두 사용하게 하는 디지털 미디어는 아직 글말 중심으로 되어 있는 현대인의 의식 구조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하이퍼 텍스트 중심의 글 쓰기와 글 읽기는 인쇄 매체에 기반한 이성주의 중심의 각종 이데올로기들과 근대 사회 정치적 제도의 기반을 와해시킬 것이며,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의 디지털 미디어는 전자 대중 매체가 생산해 낸 거대한 대중 사회를 해체시킬 것이다.

디지털 정보 양식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원본과 복사본의 구별이 없다는 점이다. 텍스트건 영상이건 소리건 상관없이, 모든 디지털 정보는 자신과 똑같은 완벽한 복제본을 생산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기계적 복사가 예술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면서, 기계적 복사(인쇄 매체와 사진)는 예술 작품의 독특한 권위(aura)를 위협한다고 주장하였다. 벤야민은 플라톤 이래 대부분의 서구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물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속성이 있으며, 이러한 속성이 곧 그 사물의 본질이라 보았다. 모든 예술품 역시 이러한 고유한 속성을 갖고 있는데, 기계적 복사본은 원본이 갖고 있는 이러한 진품으로서의 속성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 양식은 「원본의 권위를 위협」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 버리고 있다.

이미 점차 많은 미술가들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디지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 등을 이용한 디지털 작품들은 지금까지 「원본」을 전시하는 장소로 간주되는 미술관이라는 개념 자체에 큰 혼란을 줄 것이다. 지금껏 하나의 원본이 여러 개의 미술관에서 동시에 전시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 화가는 하나의 컴퓨터 파일로 존재하는 자신의 작품을 컴퓨터 디스켓에 담거나 인터넷을 통해 여러 미술관에 동시에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디지털 예술 작품은 굳이 미술관에서 전시할 필요도 없다. 인터넷 웹 페이지에 「가상 미술관」을 만들어 그곳에 전시하면 되는 것이다. 관람객들은 편안히 집에 앉아 작품 파일을 전송받아 감상할 수도 있고 원본을 소장(?)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디지털 미술 작품들은 생산자(미술가), 소비자(관객), 유통자(미술관과 화랑)의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제도(institution)로서의 미술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줄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에 대한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19세기말 기계적 복사 기술인 사진의 발명은 처음에 미술에 대한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벤야민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위기 의식은 「예술을 위한 예술, 혹은 순수 미술」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낳았다. 기계적 복사 기술 보다 더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디지털 정보 기술에 대해 미술계가 어떠한 새로운 사조로 대응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음악은 미술에 비해 디지털 정보 기술을 별 무리나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많은 음반들이 처음부터 디지털 정보로 녹음되고 있으며, 재생 역시 디지털 양식이 이미 보편화된 지 오래다. 음악 생산 역시 처음부터 컴퓨터와 미디를 이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이용한 음반들이다. 상호작용이 가능한 시디롬 등을 이용하여 음악 소비자가 자기 취향대로 듣고 싶은 것을 짜 맞추어 들을 수 있도록 하는 음반이 이미 시도되고 있다. 또한 음악을 생산하는 기술이 보다 쉬워지고 이를 위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보편화되면, 누구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스스로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음반을 쉽게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미 많은 책들이 데스크탑 컴퓨터에 의해 출판되고 있는 것처럼 음반도 데스크탑 컴퓨터에 의해 출판될 것이며, 이러한 변화는 대중 매체를 통한 음악(대중 음악)의 소비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이미 가져오고 있다.

디지털 정보 양식이 더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분야는 문학이다. 물론 글쓰기 행위와 책이라는 형태는 인쇄 매체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근대 문학은 동일한 텍스트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인쇄 매체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인쇄 매체가 글쓰기와 글읽기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처럼, 디지털 정보를 기반으로 한 하이퍼 텍스트는 분명 또 한 번 문학의 하부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처음도 끝도 없고 비단선적(non-linear)이며 순간적인 교차 참조(cross-reference)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이퍼 텍스트는 전혀 새로운 문장과 구문 구조를 생산함으로써, 근대의 기본 정신인 이성주의와 논리 중심적 사고 방식을 해체시켜 갈 것이다. 바르트가 선언한 작가의 죽음은 하나의 은유가 아니라 현실로서 나타나고 있다. 동일한 텍스트를 읽는 독서 대중 자체를 없애 버리는 하이퍼 텍스트는 문학 비평이라는 형태의 글쓰기 행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영상과 음향이 문자로 된 텍스트와 함께 어우러지는 하이퍼 텍스트는 소설과 영화 그리고 비디오 게임의 요소를 한데 융합시키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있다. 10만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 간주되는 시디롬 시장에서 무려 150만 부가 넘는 판매를 기록한 미스트(Myst)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문학 형태의 전조로 여겨지고 있다. 하이퍼 텍스트의 시대에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창작해 내는 천재적 작가의 전통이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다. 문자적 텍스트는 혼자 앉아서 쓰기만 하면 되지만, 영상과 음향,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텍스트를 혼자서 동시에 생산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생산에 여러 사람의 공동 작업이 필요한 것처럼, 새로운 형태의 문학 텍스트 역시 공동 작업을 통해 생산될 것이다. 아직 이러한 하이퍼 텍스트는 시디롬 등의 형태로 소비되고 있지만, 컴퓨터 통신망이 더욱 발달하게 되면 아마도 통신망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될 것이다. 인터넷 상에 하이퍼 텍스트로 존재하는 문학 작품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참여하여 작업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며, 또 독자에게도 텍스트 생산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항상 발전하고 변해가는,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데 어울어져서 구분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열린 작품」이 될 것이다.

디지털 정보 양식은 근대 정치 체제와 법률 제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대의 민주주의 자체가 인쇄 매체 등의 대중 매체의 산물이며, 모든 법은 텍스트이고 대부분의 법률 행위 또한 종이 위에 씌어진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 철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대의 민주주의는 우리 몸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말하면서 동시에 들을 수 없고, 일정 수 이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또 동시에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들을 수도 없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를 인쇄 매체와 전자 매체를 통해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인류는 대의 정치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지평을 더욱 넒혀 줄 디지털 정보 기술은 새로운 정치 체제의 출현을 초래할 것이다.

21세기에 우리 사회의 주된 매체가 될 디지털 미디어는 이미지 중심의 영상 매체라기 보다는 인간의 여러 감각에 동시에 작용하는 다감각 매체이며 나아가 원격현전 (telepresence)을 가능하게 하는 가상현실의 미디어다. (가상현실 또는 VR은 주로 기술적, 장비적 차원의 개념이고 원격현전은 주로 그러한 기술적 장치를 통해 얻게 되는 체험 또는 경험의 차원을 일컫는다.)

 

인문학의 임무

인문정신이나 인문학은 결코 문자학이나 문자 매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된다. 21세기의 인문학은 문자 매체와 인쇄 매체를 뛰어 넘어, 그것을 포괄하면서 디지털 미디어와 기존의 영상매체를 한데 포괄하는 인문 정신을 창조적 계발하여야 한다.

물론 인문학 없이는 영상학이나 영상 문화는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이 때의 인문학은 인쇄매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쇄매체에 기반하여 18-19세기의 인문학이 꽃피었던 것처럼 이제는 디지털 매체에 기반하여 새로운 인문학, 새로운 인문정신이 그 빛을 발하여야 한다.

이제 인문학은 인쇄매체에 기반한 문학, 역사학, 철학 등의 학문이라는 편협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컨대 문학은 디지털 다중매체에 기반을 둔 글쓰기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발에 힘을 쏟아야 한다. 다중 매체를 이용한 이야기하기(서사)의 작업은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또 역사학은 특히 매체 발전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해 보아 미디어의 역사를 통해본 문화사를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철학은 컴퓨터와 디지털 미디어가 자아와 사회와 세계에 대해 어떠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디지털 정보의 존재론적 의미, 월드와이드 웹과 컴퓨터 네트워크의 세계적, 도구적 의미 등에 대해서도 탐구해 보아야 한다. 언어학은 자연언어처리 등 인공지능 연구와 관련해서 많은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네트워크상에서의 전문가-지식 시스템(Knowledge-Expert System)구축에 창조적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육학은 다중매체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교육 시스템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교육과정에는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할 수 있으며 또 그래왔다. 옛날 서당에서는 천자문(종이책), 먹, 붓, 회초리, 사랑방 등이 그 도구였다면 이젠 디지털 미디어, 인터넷, 사이버 강의실 등이 그 도구가 될 것이다.

미디어의 조건은 인간의 문화 사회적 활동의 기본 양식을 결정지으며 미디어의 변화는 따라서 문명의 변동을 가져온다. 물론 글쓰기 자체도 매체의 발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컨대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 식의 글쓰기는 신문이라는 매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소설이라는 양식의 글쓰기도 대량 생산되는 책이라는 매체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앞으로 글쓰기와 인문학의 발전 방향은 디지털 미디어가 어떻게 전개되어 가느냐에 따라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 기술에는 미리 정해진 내재적 의미가 없다. 어떠한 기술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그 기술의 사회적 의미는 달라지게 된다. 새로운 기술에 어떠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느냐는 바로 어떠한 것이 옳은 것이냐의 가치 판단의 문제이며 윤리와 도덕의 문제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며 어떠한 사회가 더 살기 좋은 사회인가 하는 문제는 디지털 미디어 자체만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서는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인문학은 이에 대한 답을 주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지금까지의 디지털 미디어 기술 발전의 직접적인 원동력은 군사적 필요성과 자본의 자기 이익의 확대라 할 수 있다. 이제 인문학은 이미 발전해가는 기술의 꽁무니만을 헉헉 대며 뒤쫓을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미리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미디어가 보다 인간다운 삶, 보다 살만한 사회 건설에 도움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