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현상읽기 - 연극 |
연극과
춤 안 치 운 (연극평론가) 예술과 몸의 언어 여기 우리의 몸이 있다. 사람의 몸이 있다. 역사와 문명은 지워진 그러나 지워지지 않은 몸들의 흔적들이다. 극장을 희곡과 관객이 만나는 곳이라고 정의하는 데,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의 몸과 몸이 만나는 곳이다. 몸은 몸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극장에 간다는 것은 몸이 몸을 향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몸에 대한 기대감을 지니는 일이다. 풍경과 더불어 사람의 몸이야말로 가장 큰 볼거리일 터이다. 인체를 소묘하고, 나체를 그리듯, 인물에 바짝 가까이 혹은 멀리 떨어져 사진을 찍듯, 사람의 동선을 앞두고 공간을 분할하듯 연극과 춤에서도 몸은 가장 중요한 표현매체인 동시에 표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식으로 말하면 몸은 “(말을 모두 빼앗겨)…표현했으나, 표현되지 않은, 즐거움만 남긴”(「베니스의 상인」, 3막 2장, 184) 그 무엇이다. 몸은 기억을 저장하는 곳이다. 나이든 사람의 몸에 있는 주름(살)을 떠올리면 된다. 연극인류학자인 의제니오 바르바는 죽은 할머니를 회상하면서 몸은 “진실의 순간을 내포한다”라고 말한다. 그가 지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내 눈 앞에서 여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하는 늙은 여인의 이미지, 헝틀어진 하얀 머리카락의 관능미, 교태, 허영, 우아함,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비추이는 거울을 통해) 시들어 버리고, 세월의 흔적이 베인 한 얼굴의 이미지”속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하나의 신체적 기억에 의해서 융합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종이로 만든 배」, 제 1장에서) 또한 몸은, 배우와 관객을 막론하고, 사회 속에서 생출되고 길들여지고 교육되고, 코드화된 언어이기도 하다. 걷는 것, 앉는 것, 말하는 것, 태도를 보이는 것, 울고 우는 것, 억압하는 것, 폭력을 가하는 것 등, 몸은 사회-비트켄슈타인의 표현을 빌리면 공공적인 세상- 안에 있으면서 사회의 모든 것들과 상호작용하는 연장과 같은 보여지는 매개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면에서 보는 주체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는 이것을 몸의 기술들이라고 명명했다. 연극과 춤의 거주지인 극장은 그 기술들을 유포하고 전승하고 동시에 파괴하고 부정하는 곳이다. 연극과 춤은 근본적으로 몸과 몸에 대하여, 몸이 움직여 말하려고 하는 예술이다. 몸을 떠난 연극과 춤은 상상할 수 없다. 일상과 예술에서 몸은 의미이면서, 이미지이면서, 기호들이고, 언어이고… 수많은 수식이 가능할 것이다. 하여 몸은 현대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자가 된다. 현대 추상미술, 현대연극, 춤연극 등에서 몸은 더 이상 상징적인 매체가 아니다. 오늘날 예술은 몸을 탐사한다. 몸 그 자체에 관심을 돌린다. 일상에서 소외된 몸, 교육에서 천대받는 몸을 되찾고, 몸을 왜곡하는 예술을 반성한다. 몸으로 하는 대표적인 예술인 연극과 춤은 몸으로 숨쉰다. 그런 이유로 연극과 춤을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연극은 몸을 소홀하게 대한다. 몸이 몸같지 않고, 말이 말같지 않은 시대에 연극과 춤은 어떻게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가? 땅을 기면서? 공중에 홀로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정처없이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면서? 그럴수록, 더할수록 연극과 춤의 연구는 그것이 머무르는, 그것을 드러내는 몸으로 되돌아 가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되물어야 한다, 아주 지독하게. 몸이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를. 어원학으로 돌아가면, 몸은 불사름의 시작인 삶과 불사름의 끝인 죽음이 함께 하는 자리이다.(우리말 다/살다(生)/사라진다(燒)의 어원은 같다.) 마음(정신과 이성)은 지배하는 주인이고, 몸은 지배받아야 하는 도구가 아니라 동일한 한 개, 안과 밖의 관계,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몸 안에는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없다. 몸은 되돌아 갈 길이 없다. 몸이 저항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정상적으로 살기가 괴로울수록 몸은 차라리 미쳐 버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몸은 쉽게 미쳐지지 않는다. 미치고 싶지만 미쳐지지 않는 몸에서 우리는 몸의 진실을, 어두운 시대, 정상적이지 못한 시대를 읽어야 한다. 그것을 몸의 욕망이라고 해도 좋고, 몸의 결핍이라고 해도 좋다. 미치고 싶다는 것이 한계에 이르면 몸은 몸 아닌 몸, 즉 몸같지 않은 몸의 임계점에 도달한다. 그것이 광기이다. 광기의 몸은 갑작스런 파열음, 순간적인 빛, 고열을 뿜어내는 어두운 세계의 몸이다. 그 몸에서 나오는 언어는 얼마나 절대적이고 투명하고 오만한가. 연극에서 최초의 몸은 인간과 동물이 반반씩 섞인 것(사티로스)이기도 했고, 제 몸에 상처내는 기술을 습득한 탁월한 존재(디오니소스)이기도 했고, 어느날 갑자기 돌림병에 걸려 죽어가는 다수였으며,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부터 알 수 없는 병을 이어받아 고통받는 존재이기도 했고, 매독, 에이즈에 이르는 모든 질병의 거주지이기도 했고, 벌거벗은 채 등장하는 마네킹과 같은 몸이기도 했다. 러시아 리얼리즘 연극들, 예컨대 고리키 연극 「밑바닥 사람들」과 같은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계적이고 능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도 끝에 남은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의 일그러진 몸들을 보여준다. 브레히트의 희곡 「서푼짜리 오페라」에서는 거지들이 전쟁의 피해로 불구가 된 몸들을 흉내내며 피켓을 들고 지나간다. 이처럼 연극에 들어온 사실적인 몸들은 인물을 상징하되 그 사회의 전망과 같다. 베케트의 희곡 「승부의 종말」, 이오네스코의 「코뿔소」에서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갑자기 동물로 변해 불구가 된 몸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구화된 전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만큼 몸이 지닌 관능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몸은 영국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처럼, 고깃간에 걸려있는 고깃덩어리와 같다. 불가사이한 덩어리가 되기도 한다. 연극과 춤 즉 공연예술의 시작과 끝은 몸이다. 모든 공연예술은 몸으로 이 세계를 저장하고, 해석한다. 몸의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몸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표현이다. 표현이란 몸을 짓눌러 주름을 내는 일이다. 표현이란 밋밋한 몸의 상징이 아니라 몸이 지닌 상처가 바깥으로 나온 기록과 같다.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포르노 연극이란 상처가 없는 밋밋한 몸의 진열장과 같다.) 몸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으면서 자기자신에게 혹은 타인에게 위장할 수 없는 것이다. 어두운 시대는 몸이 분열하는, 몸의 상처가 수없이, 깊게 늘어나는 시대이다. 보이는 대로의 몸, 드러내는 대로의 몸, 숨기는 몸, 벌거벗은 몸, 상승하는 몸, 추락하는 몸, 지시하는 몸, 의미하는 몸, 나의 몸, 내 것이 아닌 나의 몸, 몸다운 몸, 몸같지 않은 몸, 아픈 몸, 쉴 곳 없어 나뒹구는 몸 등등으로. 몸이 얼마나 중요한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몸이 울려야 한다. 부아로 들어간 들숨이 다시 날숨으로 나오면서 그대의 성대를 울리듯. 그 소리는 다시 입 안이나 코 안에서 자음과 모음으로 갈라지고 무수한 떨림을 더해 울고, 음성을 낸다. 음성은 다시 닿소리와 홀소리로 결합하여 음절이 되고 형태소로 인식되고 언어가 되고 정보가 되고 인식이 되고 전달이 된다. 듣는 이의 고막을 울림으로써, 공명해서 공감에 이를 때까지, 몸을 울릴 때까지. 그런데도 몸을 탓해야 하는가. 왜 아직도 몸이라고 하면 가벼운 것을 떠올리고, 야한 것을 말하는 것일까. 몸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다. 한자로 말해서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몸없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우리 몸은 밖에서 보여지는 것(그러므로 객관적 성격이 제시된다. 반면에 메를로 퐁티는 나에게 있어 보여지는 것이 우선이다. 즉 자기 몸은 자기에게 있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것으로 일종의 특권적 직위를 가지고 있다.)이다. 몸은 보여지는 것인 동시에 보는 것이다. 동양철학에서는 심신일여(心身一如), 심신일체성이라고 한다. 이 말을 바꾸면, 인간은 사물을 도구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몸 역시 도구로 갖는다. 인간은 몸의 존재인 동시에 몸을 도구로 보유한다. 하이데거는 도구 zuhandenes(“손 밑에 있는 것”이란 뜻/…을 위하여 있다는 존재양식)를 ‘존재의 투기성(投企性)’이라고 정의한다. 도구는 사물이다. 사물의 전체적 연관관계가 세계이다. 그러므로 자기=몸=도구=물=세계 라는 객체적 존재연관의 관계가 성립된다.(몸이란 간주체적(間主體的) 의미를 뜻한다.) 이것을 다시 구분하면, 몸을 지닌 인간의 수동적-능동적 이중의 관계구조가 성립된다. 마음의 주체성과 몸의 객관성은 불가분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고하고, 주체성(대자)와 객체성(즉자)으로 서로 구별되는 존재양식을 나타낸다. 마음이 이렇게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몸의 움직임이 그에 따르지 못하는 것은 몸이 마음의 움직임에 저항하는 무게있는 그 어떤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의 일치가 동양의 공연예술이 추구하는 정점일 터이다. 예컨대 마음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이 일치하는 것. 붓이 스스로 움직인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심신일여의 예의 경지이다.(여기서 근대적 연기론의 이론적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 인물과 배우의 일치에서 분리에 이르는 도정, 인물과 배우의 동일시, 인물이 부재하는 배우의 존재. 나아가 인물과 배우가 아예 부재하는 존재방식에 이르기까지. 이 부분은 다른 기회에 서술하기로 한다.) 일본의 고전 연기론을 대표하는 세아미의 「화전서花傳書」(風姿花傳)에는 「年來稽古條」이라는 제목의 문장이 있다. 년래계고란 어릴때부터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계고의 마음자세를 말한다. 계고란 선의 수행에 비유할 수 있다. 계고의 목적은 화(花)를 얻는 것이나 세아미가 말하는 화는 직접적으로는 무대의 예 혹은 연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연기의 본질 또는 예가 지향하는 이념을 상징하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완성의 경지인 ‘성(誠)의 꽃’이란 육체적 쇠퇴에도 불구하고 지지 않는 꽃인 “화골(花骨)에 새겨진 꽃”인 것이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진정한 예라는 것은 관념만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혀가는 것. 즉 오랜 세월동안 엄한 계고로 체득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몸이 있는 한, 우리는 주체적 존재이며 동시에 객체적 존재 즉 양의적 존재 성격을 지닌다. 행위란 세계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이다. 즉 세계의 사물(존재자)에 대하여 인간이 몸을 매개로 능동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행위이다. 이에 대하여 자기는 신체적인 감성적 직관을 통하여 세계 사물의 존재상태를 수동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몸이 공간 내에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자와 함께 하나의 객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제 몸뚱어리를 잃어버리면 온 누리의 물질이 아무 쓸모가 없다는 뜻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이것을 부정하는 이가 있을까. 한데 왜 자신의 몸, 타인의 몸, 우리 모두의 몸을 그토록 우습게 여기는가. 우리는 이 세계 안에 몸으로 있다. 몸이 없이는 우리는 이 세계에 있을 수 없다. 친구 중에 가장 친한 친구를 한자로 지기(知己)라고 한다. 가장 친한 친구는 다름 아닌 자신의 몸(己)을 알아주는知 이이다. 옛날에는 사람을 저울질하는 기준으로 신(身)언(言)서(書)판(判)이라 하여 몸의 생김새를 큰 자로 삼았다. 제국주의 시절, 천하게 여기던 노예의 몸에 의해서 몸값이란 단어가 나왔을 뿐, 몸은 한 순간도 거름이 없이 먹는 먹거리에 의해서 목숨이 담기는 터이다. 몸들은 사회에 따라, 문화적 차이에 따라 상징하는 것도 차이를 지니며, 집단 안에서 정체성의 확인과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다른 사회적 코드를 지니고 있다. 사회학에서는 어빙 코프만 같은 학자들이 ‘상호작용의 의식들’이란 이름으로 이를 분석하기 한다.(그의 저서 「자아표현과 인상관리-연극적 사회분석론」, 경문사, 1987을 참조할 것) 몸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그에 딸린 모든 부분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의 몸을 작은 우주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몸이 눈. 코. 귀. 입과 같은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연극 인류학은 배우와 연기교육을 위하여 “선(先)표현성”, “균형”, “대립”, “에너지와 현존”, “균형의 원칙”, “생략의 미덕”, “눈과 얼굴”, “말하는 손”, “발의 문법”, “몸의 기술”, “근원의 연극”, “문화상호주의 관점에 의한 연습”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몸을 기초로 한 것들이다. 어원학으로 돌아와서, 내일(來日)이란 단어는 순수 우리말이 아니다.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아름다움 우리말은 오늘이다.(오늘의 ‘오’는 오는, 온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늘’은 시간과 공간을 소유하는 말로서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육체가 아니라 몸은 아름답기 그지없고 뜻과 글자가 절묘하게 어울린 훌륭한 우리말이다. 한의학에서는 몸에 있는 경혈의 숫자를 삼백육십여 개로 본다. 그래서 몸이란 말의 어원은 동사 모으다, 여럿을 한 곳에 오게 하거나 저축하는 것을 뜻한다. 움직임을 드러내는 동사의 어간 ‘모으ㅡ’에 명사형 어미 미음(ㅁ)이 붙어 음절이 줄어지면 ‘모음’이 되고 다시 ‘몸’이 되어 긴 소리로 내게 된다. 몸은 묶음이며 모음이되 짧게 끊기는 것이 아니라 길게 이어진다. 그래서 몸은 홀로 있지 않고 관계의 미학을 창출한다. 죽은 몸이 그대로 끝나지 않고 대대로 혈연관계로 이어지듯이. 내연의 관계, 외연의 관계가 몸 안과 바깥에 공존한다. 몸은 외연과 내연의 경계에 놓인다. 내연이 억압받으면 외연으로 방향을 틀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몸은 개인의 밀실이며 광장이다. 남녀간의 사랑은 밀실과 광장을 오고 가며, 그 사이에 길을 트는 일이다. 몸을 열었다라는 뜻은 곧 길을 내었다라는 뜻이다. 즉 내연으로서의 밀실이 비로소 외연으로서의 광장 구실을 하게 된 것을 뜻한다. 몸은 공동체의 텃밭이다 그러므로 몸은 갈고 닦아야 할 터가 아니겠는가. 배우는 몸을 닦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이다. 배우의 몸은 결코 버려진 땅처럼 그냥 놓아둘 수 없는 황무지가 아니다. 몸이 황무지인 것을 상상해보라. 몸 안에서 훵한 바람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쏠려 다니는 길들만이 나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라. 가뭄으로 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금들이 몸에 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라. 몸은 가꾸기에 따라서 화려한 정원이 될 수도 있고, 삭막한 사막의 벌판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몸과 몸의 어울림에 달려 있다. 우리의 몸이 여러 부분을 한데 얼려 한 인간의 영혼을 가르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거룩한 자연도 하나의 몸, 곧 공동체인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이웃이나 배달겨레로서 같은 핏줄을 나눈 남과 북으 말미암음은 같은 한 아비의 몸에서 갈라져 나왔으매 우리의 몸, 우리 겨레는 하늘이 섭리하는 한 묶음이다. 몸은 하나의 묶음에서 다른 묶음으로의 이어짐이며, 이어지는 어울림이며, 때로는 삶과 죽음의 모습으로 달라지기는 하나 본디 그 또한 한 몸에서 비롯한 것임을 뜻한다. 우리는 한 몸이다라는 말은 거룩한 이 세상과 한 몸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몸을 중심으로 하는 공연예술의 뜻을 찾을 수 있다. 몸으로 하는 춤과 연극은 사람과 사람을 묶는 예술이다. 묶어 하나로 이어 놓는 예술이다. 그렇게 해서 살아 있음과 죽음을 묶어 삶 전체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예술이다. 춤과 연극을 만남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몸(모으다, 모든, 모두, 만나다, 뭇, 무리, 모임)이 있기 때문이고, 몸으로 하기 때문이고, 창조자와 수용자 모두 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을 바깥으로 여기고, 몸을 정신과 다른 것으로 구분지으면 몸은 추락한다.(그것이 지난 역사이고, 우리의 사유를 억업하는 장치였다.) 상대적으로 정신은 안의 것이 되고, 숭고한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이분법적 구분이 지나치면 몸은 정신의 활동을 방해하는, 정신이 지닌 자유의 실현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데카르트까지 서양철학은 몸을 정신의 감옥 혹은 영혼의 시녀라고 했다. 몸을 지배했던 담론들은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은 몸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통제하고 관리했던 것이다. 도덕적이고 관념적인 이성적 세계관 뒤에서 몸은 음습하게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다. 열등한 존재로, 사악한 존재로, 몸의 감각은 변덕스럽고 저열하고, 부도덕한 열정으로 정신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으로. 근대 이후, 한국 춤과 연극의 역사는 이러한 억압적인 삶의 방식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철학은 몸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몸은 껍질이고, 정신은 내면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더 이상 유효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현대의 몸은 겉과 속을 완전하게 무화시킨다. 니체이후, 현대철학은, 거칠게 말하면, 몸의 철학이다. 정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자연이란 영역 바로 몸이다. 몸은 자아와 동일한 그 무엇이다. 겉이 아니라 겉과 속을 묶은 그 무엇이다. 지금까지 겉을 지배해 온 것은 속이었다. 그것이 몸을 업신여긴 정신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글 맨 처음에 쓴 대로 몸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의 부정적인 소산이다.
연극과 춤은 삶의 흔적을 몸에 새긴다 아프게. 왜 다시 몸인가를 묻자. 현대사회의 특징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라 가짜이다. 즉 상(像)이다. 상은 변화, 변형시킬 수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현대사회의 자본과 기술이다. 가짜인 상 혹은 이미지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이 몸이다. 몸은 실존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실존하는 실존 그 자체이다. 그래서 몸은 덧없다. 덧없이 지나가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몸은 위험하고, 나약하고,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은 그 무엇이다. 몸을 말하는 것은, 몸으로 말하는 것은 삶과 세계의 위험성, 나약함, 불완전함, 미완성을 극명하게 말해주는 그 무엇이다. 그런 세계의 한계를 넘어가는 새로운 가치이며 도구이며, 사유이며 이데올로기이다. 바야흐로 몸의 시대이다. 그래서 몸은 썩어 사라진다. 현대연극과 복수 문화주의, 그와 상관하여 몸의 이미지가 변한다. 이제 남은 것은 변형된 몸, 조작된 몸들이 기어나온다는 점이다.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면, 기호화된 몸들이 미끄러져 나온다. 한 켠에 병걸린 몸들이 있고, 다른 한 켠에 미끈한 몸, 규격화된 몸들이 서 있다. 몸은 죽어가면서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 몸은 이제 연극을 떠나 모든 장르가 지닌 걱정, 염려와 같다. 동시에 희망이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집약된 지점이 몸이다. 몸을 숨길 곳이 없다, 더 이상 몸을 보호해 줄 보호막이 없다. 돌아갈 곳은, 몸이 나온 곳은 이미 닫혀 있다. 몸은 정신인가, 물질인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몸의 시대에 몸의 변두리에 놓이는 가벼운 사유가 있고, 몸을 팔고 사는 집단적인 가학성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속아서는 안된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몸은 몸이라는 것을 견뎌내지 못한 몸이며, 시간을 저장하지 못한 몸이며, 시간을 내면화하지 못한 채 드러나기만 하는 도구로서의 몸일 뿐이다. 즉 시간을 몸에 내면화할 줄 모르는, 그것을 결코 사유하지 않는 천박한 몸, 정확하게 말해 몸의 환상만을 불러일으킨다.(예컨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어른들을 보라. 속된 말로 어린 남자 혹은 여자아이들을 영계(軟鷄)라고 말하면서 좋아하는 이른바 유아애호증(p즣philie)의 환자들인 어른들이 많은 나라는 우리나라뿐일 것이다. 시간과 싸우지 못하고, 시간을 내면화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면에서 더욱 비감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들을 탓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몸도 우리의 몸일 터이므로. 몸은 이제 겨우 몸에 붙어있는 수많은 식민의 언어들로부터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자본주의는 지금 우리들의 몸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들방식대로 몸을 길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유지인 몸이 때로는 구분이 없고, 몸들이 똑같아 지는 것은 몸을 식민화하려는 자본주의 시대, 문명의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배우들은 거의 다 자본주의의 욕망에 길들여진 비슷한 몸들을 지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려야 한다. 고도를 기다리듯이. 몸들이 서로 묶여 하나의 몸이 되듯이. 그것이 몸으로 하는 예술인 춤과 연극이 짊어지고, 보여주고, 울려 주어야 할 의무와 같다. 몸이 울릴 때까지. 몸이 자신의 몸에 이르도록 하는 것, 몸을 움직여 몸이 지닌 내밀한 실존의 영역을 탐색해나가는 것, 몸이 지닌 원초적인 생의 감각을 되불러 오는 것, 상징과 의미로 몸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몸으로 하는 연극과 춤이 지닌 본질적인 몫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