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21세기 문화예술과 영상이미지-총론

인문학의 기초 없는 이미지 예술의 운명
-인문학이 동반되지 않는 이미지 예술이 설 자리는 어디일까?

 

정 현 기 (연세대교수)

현대문명은 시각 그림자와 누더기 조각 틀로 조성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 4년 전에 나는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부터 불어를 공부하였고, 석·박사 학위 과정에 반듯이 치뤄야 했던 입학시험이나 종합시험 제 2외국어 시험에 언제나 불어를 택해 끙끙대며 공부했던 것이므로, 프랑스 작가나 철학자들의 저술을 읽는 것이 나의 지적 여행의 출발점이자 도착지였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지식 내용들이 이 프랑스 지식 내용들에서 거의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 파리 여행을 꿈에 그렸다는 이야기는 거짓일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뒤늦은 프랑스 여행의 느낌은 실망 그 자체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나는 속으로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파리 한 복판인 콩코드 광장 한 복판에, 이집트 신전이나 왕궁 앞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인식되던, 오벨리스크가 올연히 서 있는 것은 더욱 기괴해 보였다.

파리의 박물관 속에는 무수한 그리스 신전 조상들과 이집트 유물들로 가득 찼었는데 도대체 나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가 서양문명의 한 거대한 젖줄인 줄은 이미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지만 이 정도로 프랑스가 고대 그리스의 것들로 치장한 나라라는 것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 문학이나 철학을 가르쳤던 내 스승들 여럿 가운데 아무도 나에게 이것을 귀띔 해 준 어른은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 박물관 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그리스의 신상들은 적어도 내겐 그리스 신화라는 엄청난 삶의 체계의 한 모상(模像)으로 인식되어 오고 있었다. 이미 이집트나 그리스는 나라의 세력이 위축되어,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진행되는 새로운 신화 세계의 뒤편에 자리잡고 있지만, 문화의 고귀함과 그것이 영원한 상품임을 아는 프랑스나 영국은 이것을 박제된 상태로 보존하면서, 관광 장소로도 돈을 벌고 있었고 또 그 내용들을 책으로 찍어 세계 주민들에게 팔고 있었다. 다른 나라 고대 문화 상징물들의 박제품 전시와 그것들의 상품화를 가능케 한 것은 문화 가치를 높게 인식할 줄 아는 인문정신의 결과일 것이다. 그들이 파는 것은 비록, 눈에 띄는 조상(彫像)으로서, 겉껍데기처럼 보일 터이지만 그들은 그것들의 핵심 내용인 인문정신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미지 상품의 몸체는 곧 인문정신임을 그들이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한 민족의 인문학이 튼튼하게 세워지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 나의 경험이 얼마나 강렬하였는지 벌써 나는 짤막하나마 세 번째로 이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세상 읽기를 시도한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할 때에도 고고학자들을 대동하였고, 앙드레 말로가 베트남 오지에서 문화유물을 훔치다가 들켜 법정에 섰을 때에도 프랑스 지식인들은 앙드레 말로 편에 서서, 은밀하게 감행한 지식인의 절도행위를 비난하는 대신, 그의 뛰어난 문화감각을 두둔했던 것이다. 자명하게도 그 결과는 자기 조상들이 생활하면서 쌓아 올린 인문정신의 결과인 문화유산을 방치해 두고 있던 베트남인들이 그렇게 쪼그라든 후손임을 스스로 세상에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는 이처럼 인문학의 중요함을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결판나고 있음을 목도한다.

몸을 담가 여독을 풀고 싶어 목욕탕을 찾던 내게 가르쳐 준 곳을 찾아간 곳은 중세기에 지어졌던 목욕탕이었고, 그 곳 역시 역사 유물로서 박제된 채 고이 보존되고 있었다. 관광 상품으로 중세의 생활 흔적들은 파리 시내 한 복판에서 잘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험은 이후 세계를 휩쓸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헐리우드 영상 제작진들이, 비록 가끔씩은 그들의 막강한 재원인 과학발전의 힘을 이용한 영상을 만들고는 있지만, 대부분 고대 그리스나 바빌로니아, 이집트 문명의 문화내용을 고스란히 베껴 먹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다. 세계를 휩쓰는 미국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의 머리 속에는 고대 그리스 신화 내용들이 고스란히 이식되어 있다고 나는 읽는다. 「레이더스」, 「인디아나 죤스」 등의 영상 예술 상품들을 상상해 보면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쉽게 확인될 수 있다. 문화가 최고의 상품임을 아는 이들은 언제나, 무자본으로 빌려 올 수 있는 고전으로부터 그들의 현대 상품을 만든다. 한국의 명절인 추석 연후에 해마다 몇 편씩은 한국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방영하는데, 이 홍콩식 중국 무술영화들도 그 기본 판본은 그들의 고전에서 따온다. 전설적인 역사인물 황비홍의 이연걸로의 복제 영상물. 그렇게 해서 그들은 자기들, 서양은 서양대로, 동양은 동양대로, 고대 신화와 현대 신화를 융합시키면서 새로운 신전들을 쌓아가고 있다.

현대의 신화 정점에 있는 올림프스 신전은 아마도 미국의 베벌리 힐즈나, 백악관 영역, 롤링 힐스 등, 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수도 요하네스버그 지역 속에 위치한 그림 같은 해안도시의 눈부신 저택들일 터이다. 그런 곳들을 장악하고 있는 여유 만만한 은행가들, 세계정치의 중심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 대통령, 현대적 제우스에 해당할 빌 게이츠와 그들 주위의 신(神)들은 세계 곳곳 어느 곳이나 번쩍이는 힘과 넘치는 재부의 공간으로 확장시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렇게 황금 신상으로 번쩍이는 엄청난 크기의 저택과 빌딩,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무기로서의 현대장비를 보유하며 삶을 즐겁게 누리는 이들이야말로 현대적인 신이다. 그들의 힘은 온전히 황금으로부터 나온다. 황금은 무기와 마약의 대명사일 수도 있다. 자연과 인간을 위협하고 또한 인간을 마취시킬 수 있는 무기와 마약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가장 큰 힘이며 동시에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기도 하다. 이런 신화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림자(이미지) 예술과 환상, 그리고 모자이크 기법을 우위로 삼는 잡동사니 문화의 세력형성이다.

좥장미의 이름좦과 좥푸꼬의 추좦를 쓴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세상 읽는 통찰력을 꽤 넓은 시공에까지 넓혀 보이고 있다. 과연 그의 통찰 결과가 얼마나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확정할 명확한 근거는 없다. 아니 어쩌면 진위의 문제인 한 한 지식인의 말은 명쾌한 정답이 없다고 읽어 두는 것이 옳은 지도 모르겠다.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만한 논거들이 아주 강력한 어조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게 보인다. 그의 글 모음집 좥포스트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좦라는 저술의 한 장인 「새로운 중세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에코는 우리가 서 있는 현대문명의 특징을 재미있게 읽을 거리로 제공한다. 그는 이 글에서 서양 중세기와 현대 서양, 특별히 미국 문명 형태를 동일한 맥락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고대를 읽는 일종의 맹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양 중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들 생각의 틀과 시각의 맹점을 비판하고 있다. 르네상스 초기 학자들이 ‘중세기를 암흑치하’로 읽어 온 것을 그는 뒤집는다. 그는 오늘날 미국의 문명형태가 중세기와 닮아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날 우리들이 중세기적 생활형태와 그 삶을 함부로 폄하해서 볼 수 없다고 읽는다. 여러 가지 동일한 징후를 드는 가운데 눈에 띄는 장면은 중세기가 ‘시각의 문화’ 틀을 지니고 있는데 비해 현대도 똑같이 휘황찬란한 시각적 장치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진단은 우리가 비록 시간을 거스르면서 올라가 볼 수 없다고는 해도, 중세기와 현대를 읽는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시각문화에서 이것저것 꿰어 맞추는 누더기 예술은 거의 숙명인 듯 싶다. ‘꿰어 맞추기 문화’에 대한 그의 말을 보이면 이렇다.

 

 

“ 중세문화와 마찬가지로 우리 문화도 체계적인 문화가 아니라 추가적이고 이리저리 꿰어맞추는 문화이다. 또 당시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엘리트의 세련된 실험이 대중적인 까발리기 문화산업과 공존하면서(세밀화와 성당간의 관계는 현대예술 박물관 「MOMA」과 할리우드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고 또 상대방으로부터 빌려오고 있다. 그리고 외견상의 비잔틴주의, 극히 다양한 물건을 수집하고 목록으로 작성해서 잔뜩 쌓아놓으려는 원초적인 욕망은 이전 세계, 즉 아마 조화로웠겠지만 이제는 사라진 세계, 상귀네티의 말을 빌면 (사람들이 두루 편력했지만 곧 망각해 버린)팔루스 퓨트레드니스(부패의 찌꺼기)로서나 체험될 뿐인 세계의 유물을 꼼꼼히 정리해서 새롭게 평가해 보려는 욕구에 부합된다.”

 

푸코의 이런 지적은 이미 좥책들의 전쟁좦이라는 짤막한 글에서 죠나단 스위프트가 설파한 작가들의 운명과도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세계의 진정한 삶으로부터 꿀을 따 모아 집을 짓는 ‘꿀벌’의 위치에서 거미줄을 쳐 놓고 지나다니는 벌레나 잡아 생계를 엮는 작가들의 신세가 18세기 이후의 작가들이라는 지적 속에는 바로 이렇게 남의 것을 주워 모아 틀을 짜는 ‘거미’의 모습이 중세기와 현대문명의 공통분모로 자리잡혀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 삶 속에는 이미 새로운 것이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 됨에 대한 탐색과 그런 인문학적 질량상승의 길은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우리 문화인들 스스로, 포기한 채 절망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머물러 있다. 도시화란 필연적으로 시각 문명을 부추긴다. 모든 예술이 이런 이미지 힘에 경도되어 있거나 거기에 창조영역이 남아 있다고 믿는 것은 아마도 필연적인 귀결일 터이다.

세계의 황금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현대의 신들은 꽤 오래 전부터 정보화를 내세우며 우리에게 영상 매체를 통한 예술만이 유일하게 남을 텃밭이라고 인식시켜 왔다. 이 인식의 바이러스는 점진적이면서도 엄청난 속도로 우리 앞에 닥쳐들었다. 컴퓨터 산업의 황금알 더미를 예견한 과학 지식 마피아들의 바이러스 살포와 이 현상은 뗄래야 뗄 수가 없다. 한국에 포진해 있는 올림프스 신들은 한국의 앞날이 바로 이 정보세계에서 뒤떨어지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느냐 하는 목표를 향한 의견몰이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른다면 그림자 예술 산업의 발전은 곧 생존과 직결된 문화정책의 골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의견 몰이는 일종의 마음의 바이러스 주입 책략에 해당한다. 엄청난 힘이면서 동시에 허구일 수 있는 이 그림자 바이러스에 대항하여 바이러스가 행사하는 권력의 익명성으로부터 인간적 자아를 지키려는 지성사회에서의 싸움은 우리들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현재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시각예술의 기본 교재는 인문정신이다

현대사회가 시각적인 그림자 문화의 틀을 지녔고 그에 따라서 모든 문화·예술이 영상물로 시각화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인 것처럼 썰물로 추진되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을 부채질한 매체가 얼마나 가공할 세력으로 우리를 전염시키는 지를 우리는 불과 10몇 년 사이에 경험하고 있다. 그 가운데 컴퓨터 산업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쇄 매체로서의 만화산업이나 TV를 통해 구체화되는 예술 전반에 걸친 그림자 구상화는 거의 이 시대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도스토옙스끼의 500쪽 짜리 좥죄와 벌좦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을 많은 현대인들은 투자하기를 거부하고 있고, 그들은 영상으로 처리된 문학이 지닌 인문학적 내용을 쉽고도 빠르게 흡수하려 든다. 그러니 그런 젊은 이들에게 그의 좥惡靈좦이라든가 좥白痴좦 등의 장편 소설, 박경리의 대하장편 좥土地좦, 황석영의 좥장길산좦, 김원일의 좥불의 제전좦, 좥겨울 골짜기좦, 좥늘 푸른 소나무좦, 프르스트의 좥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좦, 제임스 조이스의 좥율리시즈좦 등을 어떻게 읽게 할 것인가? 인문학의 기초는 문자학(文字學)이며 그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던 이유의 뜀 판은 글읽기와 글 쓰기이다. 이제 글읽기와 글 쓰기의 시대는 저물어 황혼의 빛을 띠어가고 있다. 글읽기나 글 쓰기에는 가치족들 간의 균형이라는 윤리적 관계 거리 조절과 긴장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쉽고, 빠르고, 일회적이며, 존재의 익명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영상예술은 인문학이 전제하는 긴장과 균형을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의 주도자들은 의도적으로 과거의 인문적 전통을 파괴하고 있고, 또 파괴해야만 그들의 세기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것을 막을 신념은 현재로선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강력한 물신과 결탁하고 있는 이 이미지 예술개발 열기는 일종의 신흥 종교의 모양을 띄고 있다. 전대에 있었던 모든 인문학 기반의 종교가 무너진 이유도 이런 신흥종교를 부추기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20세기 동안 여러 형태의 종교가 나타났으나 인류를 구원하는데 이미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다. 1·2차 세계 대전을 치르는 동안 인간의 악마성이 너무 노골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어떤 종교도 힘을 쓸 수 없도록 인류체험은 쓰디쓰고 험악한 것이었다. 우리들 속에 그런 악마성이 잠재해 있다는 절망감은 우리로 하여금 더는 인문학적 꿈을 꾸지 못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600만여 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음모를 폭로한 프랑스 작가이며 「현대」지 편집장 란츠만이 11년에 걸쳐 만든, 장장 아홉 시간에 걸치는 잔혹사 기록 담론, 영상물 「쇼아(Shoah)」를 보면서, 비록 가눌 수 없는 눈물을 흘렸으면서도, 그 속에 그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기독교의 ‘사랑 교리’가 여지없이 실패하는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음에 나는 경악하였다.

새로운 신화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나 아니었을까? 21세기는 이미 새로운 신화 시대에 들어서 있는지도 모른다. 현대 올림프스를 장악하고 있는 제우스 신, 미국 MC사 빌 게이츠의 권위에 미국정부 백악관이 정면으로 도전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고, 2000년 2월 16일자 K.B.S TV 프로는 그 이유와 과정, 그 주역인물들을, 길게 보도하고 있다. 세계의 인터넷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의 대표인 빌 게이츠의 독점 기업운영에 대해서 미연방정부 법무부 반독점국의 죠앨 클라인(Joel Klein) 국장은 소송을 걸었고 연방재판관 토마스 잭슨 판사는 정부에 승소판결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법의 울타리’안에서의 기업성공을 돕는다는 취지의 이 내용은 미국에 소재하는 올림프스 세력을 더욱 두려운 것으로 읽게 한다. 일인 독재를 견제함으로써 다른 기업의 발전을 돕는다는 국가적 명분과 그들의 국내 경쟁력은 물론 국제경쟁력을 높인다는 취지 속에는 더 커다란 세계 경영이라는 포석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빌 게이츠보다, 더 높은 하늘을 장악할 능력을, 미국정부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의 조그마한 일단이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 각국의 자발적인 인문정신을 옹호함으로써 이른바 세계민족의 동등한 자유와 생존권을 보존할 세력의 대표자라고 우리가 쉽게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들 백악관 주인이 전 인류의 공평한 자유 수호자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도 또한 올림프스 신전의 뚜렷한 하나의 신이기 때문이다. 신도에게만 따뜻하고 비신도에게 냉혹한 신(神)들……. 개인의 생존권과 개성을 발휘할 기본 자유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문학의 내용 속에 든 철학의 문제일 터이다. 한글 윈도우 개발을 막기 위해 벌인 빌 게이츠의 독점 경영행위를 우리는 이미 2000년 전년도에 일찍이 경험한 바 있었지만 미국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해서 눈 하나라도 깜빡하리라고 우리가 믿어도 될까?

일단 빌 게이츠는 우리 시대의 제우스이다. (아니 그 말고도 다른 제우스가 어디 은신하고 있을지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그가 장악하는 세력은 그림자이고 환상이며 문자예술을 넘어 그림자 예술의 시대를 열어제치고 있는 막강한 힘의 덩어리이다. 본격적인 신화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인간 마음의 지평 위에 군림하면서 막강한 힘을 발휘함으로써 많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神), 그것은 그림자이고 이미지이며,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의 유체(流體)인 용(龍)이다. 그림자 예술의 기능적 특징은 가명·마스크와 익명의 모습을 띄우고 있다는 데 있다. 현대의 제우스이며 용인 그들 신이 부리는 마술의 전령이 돈이라는 이름의 추상형 물질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돈으로 뭉쳐진 용 형태의 세력에 대항할 힘을 지닌 신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 힘 권역에 일단 들어서고 나면 그가 누구이든 대체로 빠져 나아갈 길을 잃고 만다. 지식인이든 예능인이든, 종교인이든 그들에게 대항할 힘을 지닌 인간은 없다.

가장 강력한 신들은 언제나 그들의 신도들이 지닌 신앙을 먹이로 삼아 그 권위를 유지한다. 모든 예술은 전파를 목표로 하여 산출되고 있고 현대 예술은 특히 빠른 전파,넓고도 넓게 퍼지는 전염력을 기본 뼈대로 삼아 조립된다. 넓고도 넓은 세계로 가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세계 각국에 널려 있는 남의 문화를 훔치거나 싼 값에 빌려 오는 것이다. 다국적 대기업 영상매체 제작자들은 그렇게 해서 누더기 그림자 예술 작품들을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들이 만드는 이미지 예술이란 곧 돈과 직결되는 산업 형태를 띄우고 있기 때문에 세계 각 국가들이 지닌 인문학적 재화인 이야기와 설화, 전설, 신화, 철학적 담론, 예능적 감각, 인간적 최고 격조, 고급한 취향, 불가피했던 삶의 방식 등은 언제나 소재로 탐나는 토양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각 종족이 오랜 기간동안 겪으면서 해결한 삶의 방식들을 연구하는 학문의 총체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그것이 문자로 된 문자학이라는 소이는 문학이나 철학, 역사학, 심리학, 미학, 윤리학 등에는 그 나라만이 고유하게 유지해 온 오랜 이야기 방식과 버릇(慣習)이 전승되어 왔기 때문이고, 그것의 전승은 대체로 그 나라 고유의 문자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 집단 언어공동체가 공용하는 문자는 집단공동체의 정신이 담는 그릇이다. 한 민족의 언어라는 그릇 속에는 그들이 행하여 온 온갖 종류 버릇의 총체가 들어 있다. 그것을 우리는 그 민족의 고유한 문화라고 부른다. 문화가 보편적인 내용이냐 아니냐는 물음은 다분히 서양식 말놀이에 휘둘려 온 우리들 현대 지식사회의 서양 철학 마인드 바이러스 중독증세와 관련이 깊다고 나는 판정한다. 모든 버릇은 보편성이 있다. 보편성은 수리적인 수치로 판정할 수 있는 언술 행위를 넘어서 존재하는 어떤 징후이다.

인문학은 한 종족의 문화를 담은 각종 그릇과 그 정신적 내용물들을 밝히는 학문이다. 기업의 성격을 띈 이미지 예술은 대체로 세계성을 강조한다. 그들 이론의 세계 속에서는 국적도 인종도 각 종족의 독특한 문화도 그 고유성이 배제된다.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깎여 나가고 잘려 나가며, 그래서 생략과 탈락되는 문화의 섬세한 고립성이 잔혹하게 거세당하기 쉽다. 인문학이 설 자리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이미지 예술의 뜀 판 트랙에는 대체로 선정성과 기괴성, 현란한 색채와 고질의 음향들만 선두에 놓이기 쉽다.

각 국가의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그 국가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을 중시하는 사상을 포괄한다. 세계 국가들 간의 인문학적 교류는 그러므로 비교학이거나 그들간의 교류 가능한 것들의 논의의 범위를 크게 넘어서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물신들이 꾸미는 일종의 음모이다. 영상매체를 통한 문화의 획일화나 이미지 예술 개발이라는 명분은, 한 나라의 고유한 문화의 빛과 힘을 거세하면서도, 세계화에 이바지한다고 강변한다. 2000년을 놓고 새 천년이라고 계속 떠드는 행위 속에도 이런 음모는 숨어 있다. 단기 4333년이라는 한국 역사를 세계인들은 물론 우리들 한국인 자신조차 까마득하게 잊었다. 2000년 전의 서양 역사란 그러면 없었던 것일까? 분명하고도 명백한 증거물들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의 저 유장한 역사는? 서양의 현대 영상물 제작자들이 고대 서양의 문화에 온통 매달려, 그것들에 빚지고 있다는 점을, 나는 앞에서 계속 말하였다. 그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집해다 보유한 박제품들 속살을 헤치고 이야기 내용들을 꾸미는 것은 바로 서양 고대 역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국내 인문학(人文學)의 확실한 축적 없이 이미지 예술 쪽으로 개발을 촉진하는 일은 자칫 국제적인 다국적 기업의 획일화 사업 일부로 전락할 우려가 높다. 자국의 역사, 철학, 문학, 고고학, 건축론, 종교학, 여성학 등의 학문적 기반 조성을 튼튼하게 한 연후에 이미지 예술이든, 영상예술이든 뛸 거리를 만드는 것이 순서이다. 한 코미디언으로서 신 지식인이라는 용어를 만들게 한 심형래 씨의 「용가리」 아이디어는 높이 평가하지만, 이미 그것은 서양 영상물의 모방 작품이지 독창적이거나 인문학적 기반을 둔 참신한 창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나는 본다. 모방이 자살 행위임을 많은 지식인들은 안다. 인문학은 각 나라 민족 단위의 정신적 빛,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각 민족이 가진 문화의 물방울 속에는 하나씩 태양이 들어 있음을 가장 시급히 우리가 깨우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