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문화로서의
연날리기 활성화 되어야 전경욱(고려대교수)
연날리기의 시기 연날리기는 세시풍속의 하나로서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우리는 누구나 어려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연을 날리던 추억을 갖고 있다. 겨울철 바람이 많이 불 때 아이들의 대표적인 놀이가 연날리기이다. 필자도 국민학교 때 서울 서대문구의 금화산에 올라가 연을 자주 날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부터 30여년 전만 해도 겨울이 되면 금화산에는 연을 날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는 서울 시내에 높은 빌딩이 별로 없었으므로 바람을 등지고 시내 방향을 향해 연을 날렸던 것이다. 연은 12월에도 날리지만, 세시풍속으로서는 정초의 세배돌기를 마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대보름까지 날린다. 정월 보름날에는 으레 연을 날리다가 연줄을 끊어 연을 날려보냄으로써 액막이를 하면서 연날리기를 마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연날리기의 시기가 섣달부터 정월 보름 사이로 고정된 사실은 농경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한기인 음력 12월부터 연을 날리기 시작하여 정월 보름날 액막이의 민속과 관련시켜 연을 날려보냄으로써 연날리기를 끝내고, 다시 농사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월 보름 이후에도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이라고 욕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고리백정은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고리백정은 수척·양수척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고리버들이 자라는 물가를 따라 이동하면서, 고리버들로 물건을 담는 고리짝 같은 것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 가운데서 전문적인 놀이꾼과 소를 잡는 백정이 나왔다. 그러므로 ‘고리백정’은 남을 천시하는 욕이지만, 특히 이들이 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정월 보름 이후에도 연을 날리면 ‘고리백정’이라고 욕했던 것으로 보인다.
액막이연과 바람개비 돌리기의 풍속 정초 세배와 성묘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마을 앞이나 갯벌에서 연을 띄우는데, 정월 대보름 수일 전에 그 절정을 이룬다. 특히 정월 대보름날 밤이 되면 달맞이를 하고 난 후에 각자 띄우던 연을 가지고 나와 ‘액막이연’을 날리는 풍속이 있다. ‘액막이연’에다 ‘액(厄)’자 한 자를 쓰거나 ‘송액(送厄)’ 혹은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는 액을 막는 글을 쓴 후, 자기의 생년월일과 성명을 적는다. 이때 연줄을 끊는 방법이 흥미롭다. 창호지 위에 쑥과 뽕나무숯을 올려놓고 빻아서 담뱃대 모양으로 20cm 정도의 길이로 만다. 이것을 실로 연결하여 연줄에 매고 불을 붙여 연줄을 푼다. 이것이 연줄에 매달려 높이 올라갔을 때 연줄을 잡아당기면, 마치 불꽃놀이처럼 불꽃이 퍼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연줄에 매달린 불꽃이 다 타면, 결국 연줄이 끊어져 멀리 날아가게 된다. 액막이연이 떨어져 있으면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다. 액막이연을 정월 보름에 날려보내는 이유는 한국에서 여러 종류의 액막이 풍속이 대개 정월 보름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액막이는 으레 정월 보름에 하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액막이연’에 대한 첫기록은 정철(鄭澈 : 1536∼1593)의 시조 <속전 지연가>(俗傳 紙鳶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 집의 모든 액(厄)을 너 홀로 가져다가 인가(人家)에 전치 말고 야수(野樹)에 걸렸다가 비 오고 바람 불 때 자연소멸(自然消滅) 하거라.
이 시조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정철이 살던 시대에 액막이연의 풍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좬조선왕조실록좭 명종 21(1566)년 1월 15일조에도 액막이연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나온다.
상원(上元)에 연을 날리는 일 - 곧 지연(紙鳶)이다. 세속에서 지연이 추락된 집에는 그 해에 재앙이 있다고 한다. - 은 예로부터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를 금할 필요가 없으나 오늘은 평소 와 같지 않다. 중궁이 외궁에 나가 아직 환궁하지 않았는데, 여염사람들이 멋대로 연을 날려 금 중에 많이 추락되었으니 오부 관령을 추고하여 치죄하도록 하라.
이 기록에서 액막이연이 집에 떨어지면 그 해에 재앙이 있다고 믿는 속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좬세시풍요좭 53에는 정월 보름에 액막이연을 날려보낸 후에, 연을 날리느라고 오랫동안 치켜뜨고 있던 눈이 상할까봐 바람개비를 돌려서 시선을 낮추게 하여 눈동자를 바로잡는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연을 날려보낸 아이들이 바람개비놀이 즉 풍차놀이를 하며 서운함을 달래는 역할도 했다.
연싸움의 풍속 연싸움에 대한 세시풍속은 ‘연줄 끊어먹기’와 ‘연 높이날리기’가 있다. 이학규의 좬낙하생문집좭 가운데 <風鳶詞>라는 한시에 연싸움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정월이라 연을 날릴 때 正月放鳶時 경성의 유협아들 京城遊俠兒 긴 손잡이 팔모얼레에 長柄八車 은빛처럼 빛나는 것은 바로 명주실이라. 銀光獨繭絲 솔개가 서린 듯한 모양으로 연의 몸체를 만드니, 鳶盤作體態 솔솔 부는 바람에 연줄이 울고, 鳴風 연줄이 길어야만 연싸움 기술 자랑할 수 있나니, 絲長矜鬪技 목줄 매듭이 구름 위로 솟아 나가네. 結出雲裏
이 시는 서울의 유협아 즉 풍류랑들이 팔모얼레에 명주실을 감아 연을 날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 의하면 연줄이 길어야만 연싸움 기술을 자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목줄 매듭이 구름 위로 솟아 올라갈 정도로 연줄을 길게 하여 연을 높이 날리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홍석모의 좬동국세시기좭는 다음과 같이 서울의 연싸움 모습을 전해 준다.
서울 장안의 연소자로서 연싸움을 잘하여 이름을 떨치는 사람은 부자나 권세 있는 집에 가끔 불려 가 연날리기를 구경시킨다. 매년 정월 보름 하루이틀 전에는 수표교 근처의 개울(청계천)을 따라 아래위로 연싸움 구경꾼이 담을 쌓은 듯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남의 연줄을 끊 느라고 서 있는 자도 있고, 혹은 떨어져 나간 연을 공중만 보고 좇아가느라고 방죽을 달리다가 담 을 뛰어넘고 지붕 위를 넘어가기도 한다.
이 기록을 통해서 19세기 전반에 서울에서는 청계천의 수표교 근처에서 정월 보름 하루 이틀 전에 연싸움이 매우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편을 갈라 연날리기를 하면 기생과 왈패들이 응원을 하고 음식을 차려서 기세를 올렸다. 개천 양쪽에는 일반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연실을 강하게 해서 다른 연의 줄을 끊기 위해 쌀밥이나 민어부레로 만든 풀에 유리가루나 사기가루를 섞어서 연줄에 바르는데, 이를 ‘가미 올린다’고 한다. 한편 유만공의 좬세시풍요좭 28에서는 연 높이날리기의 모습을 읊고 있다.
풍금이 서로 좇아 구름 속에 들어가니 風禽相遂入雲中 정신없이 높이를 다투는 아이들이라. 痴癖爭高一市童 당백사 연줄을 얼레에 감아 연을 날리니, 唐白絲繩紡車 대가집 양반들도 영성궁을 이야기하네. 大方猶說永城宮옛적에 영성위가 지연을 몹시 좋아하여, 지금까지 영성궁의 방거연이라고 한다.(昔 永城尉癖 紙鳶 至今說永城宮紡車鳶)
여기서는 연을 ‘풍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연이 구름 속으로 들어갈 정도로 아이들이 다투어 연을 높이 올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영성위는 영조 때 부마로 화협옹주의 부군인 신광수(申光綏)인데, 팔모얼레에 백당사 연줄로 일세를 드날렸다고 한다.
기복연(祈福鳶)의 풍속 액막이연에 ‘송액영복(送厄迎福)’이라고 쓰는 점으로 보아, 액막이연을 통해 액을 막고 복을 기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기복연 즉 연을 날림으로써 적극적으로 복을 기원하는 민속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연에 한 쌍의 원앙새나 박쥐 등의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원앙새는 부부의 정이 돈독한 것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에, 연에 한 쌍의 원앙새를 그려 넣음으로써 부부의 정이 돈독하기를 기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쥐는 중국에서도 흔히 연에 그려진다. 박쥐의 한자인 복이 행복을 의미하는 복(福)자와 음이 같기 때문에, 박쥐를 연에 그림으로써 행복을 기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연에 까치를 그려 넣음으로써 좋은 소식을 기대하거나, 한자로 희(喜)자를 써넣음으로써 복을 기원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우리 전통문화 지키기로서의 연날리기 예전에는 전국적으로 연을 많이 날렸지만, 특히 서울·동래·통영·예천·안주·개천 등이 연날리기로 유명했다. 요즘은 여러 지방에서 연날리기대회가 열리고, 한강 고수부지에서는 평소에도 연을 날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또 2-3년에 한 번씩 국제 연날리기대회도 개최되어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연을 볼 수 있는 기회도 있다. 현재 한국민속연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기능보유자인 노유상 옹(1904년생)을 비롯한 회원들이 각급 학교에 전통연을 보급하면서 그 계승과 발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경남 통영에는 ‘충무 비연 동우회’가 통영지방의 전통연을 보급하면서 매년 연날리기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부산의 동래 지방에서도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백운대 백사장에서 연날리기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옛날에는 통영 수군통제영의 통제사와 동래부사가 모여 해마다 연날리기 시합을 가졌기 때문에, 관아에 연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는 아전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서 각 지방마다 자기 지방의 전통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동호인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다른 지방이나 외국과 교류하면서 활발하게 취미활동을 하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경우는 전통연의 계승이 미약한 형편이다. 사실 우리의 연날리기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재미있다. 연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보내기도 하고, 연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게도 하고, 연이 마치 절을 하듯이 꾸벅거리게도 하고, 연을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다. 또 연싸움을 해서 상대방 연의 실을 끊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방패연만이 갖고 있는 구조와 형태로 인해 가능한 기술이다. 그래서 성인들도 일단 연날리기를 제대로 배우면 거기에 깊이 빠져들게 되고, 평생의 취미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의 전통문화 지키기의 일환으로 연날리기가 더욱 많이 보급되고 취미활동으로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