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화예술

문화혁명 이후의 경극




서연호 / 고려대 교수

지난 2월 12일부터 21일까지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소장, 최응구 교수)의 초청으로 중국 방문의 기회를 가졌다. 북경에서 닷새를 지내고 이어 총총 걸음으로 서안, 광주, 계림 등지를 관광한 후 다시 홍콩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중국 방문에는 공식적인 일정 이외에 내 나름으로 몇가지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 중에는 중국 예술이나 사회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과 주목을 받고 있는 경극(뻬이징 오페라)감상이나 그에 관한 자료수집, 경극계 인사와의 대담 계획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고 보니 예상한대로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뜻하였던 일을 제대로 진행시킬 수 없음이 한없이 안타까웠다.

밤시간까지 꽉짜인 일정에 공연이라고는 겨우 하루 저녁에서 잡기를 볼 수 있는데 그쳤다. 중국의 잡기(雜技)는 오랜 전통 그대로 다양하고 다채로운 레퍼터리를 고도한 기예로서 전승해오고 있었으며 우리들의 상투적인 서어커스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나 수준을 월등하게 능가하는 내용과 기술을 과시하였다. 프로시니움 아치 무대에서 전통 복식을 갖춘 여자 해설자의 안내에 따라 한 종목 한 종목씩 공연되고 객석에서는 매 순간마다 탄성과 박수가 울렸다. 2층 객석에 약 1천명의 관객이 들어찼으며 시간은 1시간3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입장료는 2원 5각(노동자의 월평균 급료는 70원정도)이었다.

몇 군데 서점을 다니며 중국연극과 경극에 관한 서적과 자료를 다량 수집할 수 있었으며, 그 곳 국제여행사의 직원과 조선측 여배우와의 대담을 통해 경극제의 현실을 취재할 수 있었다. 자금성 내부에 있는 3층의 경극극장 구조와 경극에 소요되는 각종 의상, 도구의 전시 관람도 참고가 되었다. 수년전 일본에 체류할 당시 관극한 「북경경극원3단」공연과 대만 여행시에 본「국극」(즉, 경극)의 공연도 북경의 분위기 속에서 생생하게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래에 피력되는 기록은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토대로한 잠정적인 결과임을 밝혀둔다.

경극은 북경에서 발전한 연극이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의 하나를 지칭한다. 서피(西皮)와 이황(二黃)이라는 두 가지 곡조를 기초로 하고 있어 피황희(皮黃戱)라고도 한다. 반주음악과 노래가 중요하여 청희(廳戱)라는 속명도 쓴다. 서양인들에게는 일찍부터 뻬이징 오페라로 알려져 각광을 받아왔다. 한때 국민당정부가 북경을 북평(北平)이라 개칭하였을 때에는 경극을 평극(平劇)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경극은 물론 북경을 중심으로 발전된 연극이기는 하나, 그 배경에는 역대의 중국 전통극과 광역에 걸친 각지의 연극들이 바탕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송대(宋代)의 잡극(雜劇), 원대(元代)의 잡극(혹은 北曲) 명청대(明靑代)의 각종 연극(혹은 南曲)은 경극의 예술성을 성숙시케는데 전통적인 요인이 되었다.

앞서 말한 이황강(腔)이 북경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경 이었다. 이황강에 앞서 북경에서는 곤곡(崑曲)이 유행하였다. 소주(蘇州)의 곤산에서 일어났다 하여 곤곡이라 하는데, 형식이 난해하고 장황한 저음으로 고아한 풍격을 중시하며 일찍부터 황족, 귀족학자들이 애호를 받았다. 이에 비하여 이황강은 명랑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활달한 동작이 많아서 일반 서민들의 기풍에 어울리는 양식이었다. 곤곡과 이황강은 모두 남곡계였으나 이처럼 성격적 차이가 있었다.

1790년 청조 고종의 80세 생일축하연에서 여자역 남배우인(중국용어로 男花旦) 고낭정(高朗亭)이 이끄는 휘반(徽班)극단이 이황강을 공연하여 호평을 받은 이후, 이황강은 북경에서 경극의 토대를 잡게 된 것이다. 1830년경에는 다시 북경에 서피강(西皮腔)이 들어와 이황강과 합체가 됨으로써 경극의 곡조가 완성되었다. 서피강은 원대북곡계 곡조의 하나로서 자유분방하고 힘찬 표현과 상상력을 중시하는 곡조여서 이황강과 잘 어울려 종래 귀족취향의 따분한 곤곡을 누르고 관객들의 폭넓은 호응을 받기에 이르렀다.

경극은 청대 말기인 19세기 중, 후반기에 최고의 전성시대를 자랑하였다. 경극의 희곡 각본은 3천 8백 종이나 된다고 해서 도군기의「경극극목초탐(京劇劇目初探)」에는 1천여 종이나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명대 이전의 역사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이야기에서 취재한 것이 많으며 각색물이 압도적이다. 그밖에 민간설화, 소설, 영웅담, 연애담에서 취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유명한 레퍼터리로는「귀비취주(貴妃醉酒)」「요천궁(요天宮)」「추강(秋江)」「우주봉(宇宙 鋒)」「삼차구(三琙口)」「패왕별희(覇王別姬)」「유원경몽(遊園警夢)」「단교정(斷橋亭)」「타어살가(打魚殺家)」「사진사(四進士)」「백사전(白蛇傳)」「장상화(將相和)」「양문여장(楊門女將)」「안탕산(雁蕩山)」「서유기(西遊記)」「대등전(大登殿)」「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삼국연의(三國演義)」「수호전(水滸傳)」등이 자주 공연되었다.

1949년 중공정권 수립 후에는 새로 설립된 중국희곡연구원, 중국경극단 등을 중심으로「백화제방」(百花齊放)「추진출신」(推陣出新)의 슬로건에 따라 극 내용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종래의 봉건적이고 보수, 복고적인 내용을 추방하고 국민의 창조적인 역량을 발굴한다는 각도에서 고전 상연목록의 정리 개편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지극히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경극무대에 하루 아침에 현대인과 현대생활을 도입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1958년「대약진운동」이 일어나면서 경극현대화문제는 보다 강력히 대두되었으며 상대적으로 신중론을 펴는 배판도 고조되었다. 1964년 북경에서 개최된「현대경극경연대회」는 그간에 추진된 현대화의 첫 번째 결과를 보였다. 소위 인민의 영웅, 혁명의 기수들을 주인공으로하는 사실주의적인 경극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1966년부터 10여 년간 지속된 소위 문화대혁명기간에 경극은 급격한 변모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모택동의 교시와 그 동반자였던 강청(江靑)에 의해 주도된 이른바「경극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서의 이념적 목적성과 획일적인 방법론에 의해 수세기에 걸쳐 이룩된 예술성을 상실하거나 속된 변질을 강요받게 되었다.

1963년 12월 12일 모택동은 다음과 같은 교시를 내린바 있었다.

각종 예술형식 즉 희곡, 곡예, 음악, 미술, 무용, 영화, 시와 문학 등등의 문제가 적지 않은데, 사람의 수는 많으나 많은 부문 중에 사회주의 개조에 있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효과가 극히 미미하다. 많은 부문에는 아직도 죽은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영화, 신시, 민가, 미술, 소설의 성격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중에 문제가 많이 있다. 희극 등의 부문에 이르러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사회경제 기초는 이미 변했는데 이 기초에 기여하는 상층 건축의 하나인 예술부문이 오늘날까지 아직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조사 연구하여 분명하게 틀을 잡아 이해해야 할 것이다.

1962년 봄부터 경극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온 강청은 이같은 모택동의 교시가 발표된 이후 스스로 경극의 한 단원이 되어 본격적인 혁명 대오의 선두에 나섰다. 64년 봄 상해의 지방연극인 호극(筞劇) 「노탕화종(蘆蕩火種)」을 개편하여 경극으로 만들어 공연하였다. 모택동은 이 작품을 보고 「무장 투쟁을 두드러지게 하여 사가빈(沙家濱)으로 명칭을 바꾸라」고 하였다.

모택동의 확고한지지 아래 강청은 「홍등기(紅燈記)」「기습백호단(寄襲白虎團)」「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해항(海港)」「용강송(龍江頌)」「두견산(杜鵑山)」「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백모녀(白毛女)」등의 작품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예술인들이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업무와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강청은 8가지 양판희(樣板戱)의 기치를 높이 들고 스스로를「문예의 기수」로 자처하였다.

강청은 문예계를 독점하기 위하여 그녀가 추구하는 문예사업을 위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정을 두지 않았는데, 당시 대자보중에 이러한 상황이 나타나 있다. 강청과 함께 「노탕화종」을 무대에 올렸고, 「아경수(阿慶嫂)」에서 분장배우로 모택동의 표창까지 받은 바 있는 조연협(趙燕俠)은 강청이 보낸 모직옷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냉궁(冷宮)에 갇히게 되었다. 「홍색낭자군」중 경화로 분장한 저명한 배우 백숙상은 화장 중에 논쟁을 하다가 「현행반혁명」이라는 죄명을 쓰고 18층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저명한 상성대사, 후보림, 가수 왕곤, 곽삼영 등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애초 8가지 양판희는 일반적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나, 전국적으로 8가지 극으로만 존재하고 8가지 극만을 선전하게 되자 곧 일반의 염증을 일으키고 반발심을 자아내게 되었다. 오직 강청만의 경극 천하가 되고 말았다.

문화혁명 기간 중에 경극은 남화단을 없애고 무대장치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대개 2~3시간의 장막극으로서 종래보다 대화장면이 크게 확장되었다. 가사에는 고전적인 격조가 남아 있으나 대화는 알기 쉬운 현대 표준구어를 사용하였다. 요컨대 강청이 주축이 되어 획일적으로 만든 경극은 전통적인 경극이 지니고 있던 고도한 예술성과 고전적 품격을 일시에 기형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혁신이 아닌 파괴와 타락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던 셈이다.

문화혁명의 열풍이 지난 70년대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극은 옛날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수년에 결쳐 파괴되는 변질된 것이 쉽사리 복구 재생되지는 않으나 그래도 근래에는 상당부분이 회복되었다.

현재 북경에는 북경경극원(北京京劇院)이라는 명칭 아래 네 개의 조직이 있다. 즉 북경경극원일단(一團)부터 2.3.4단(四團)까지 있는 것이다. 본래 이 경극원은 중국인들에게 예술대사(藝術大師)라 존경을 받아온 매난방(梅蘭芳)을 비롯하여 정연추(程硯秋), 상소운(尙小雲), 순혜생(筍慧生) 등 네명의 명배우가 창설한 네 극단과 역시 유명한 공연예술가인 마련양(馬連良), 담부영(譚富英), 장군추(張君秋), 구성융(堄盛戎), 조연협(趙燕俠)이 활약했던 북경경극단이 합방, 개편하여 새로 조직된 것이다.

북경경극원은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집단으로서 오늘날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네 개의 조직은 각기 독자성과 우수한 예능성을 견지하면서 국내와 해외순회공연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네 개 조직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매난방의 예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북경경극원 3단」이다. 3단은 경극계의 주류파로서 흔히「매파예술(梅派藝術)」이라고 부른다.

매난방(1894~1961)은 20세기 무렵부터 명배우로서 이름을 떨쳤으며 곤곡에도 기예가 뛰어났다. 미국, 소련, 일본 등 세계 각국을 순회하여 경극의 진가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30년대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도 그의 활약이 계기가 된 것이다. 중일전쟁 때에는 홍콩으로 피신하여 경극에서 멀어졌으나 중공정권수립 이후에는 귀국하여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개혁에도 힘썼다. 청삼(靑杉)으로서의 미모와 아름다운 목소리는 경극사상 최고봉으로 손꼽힌다.

청삼이란 청의(靑衣)를 입은 남자배우를 지칭한다. 청색으로 물들인 소박한 의상을 입고 양가의 자녀역을 해내는 여자역의 남자배우 즉 단(旦)을 일컫는다. 단이란 남자배우가 여자로 분장하는 역할의 총칭으로서 중공정권수립 이후 여배우의 등장이 많아지기는 했으나, 옛부터 단으로 분장하여 연기하는 것이 실제 여배우보다 더욱 매력있고 우아함을 더해 주었다. 매난방은 청삼, 화단(花旦), 노단(老旦), 무단(武旦), 채단(彩旦) 등 단배우로서 탁월하였다. 앞서 기술한 정연추, 상소운, 순혜생 등도 단배우로서 이름을 떨친 존재들이었다. 중국식 용어로는 명화단(名花旦)이라 부르고, 이러한 화단이 여주인공인 연극을 화단희(花旦戱)라 한다.

현재 북경경극원3단에는 많은 명배우들이 소속되어 있지만 대표적인 인물은 매난방의 아들이며 「매파예술」의 후계자인 매보구(1934~ )이다. 매난방은 모두 아홉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다섯명은 요정하고 나머지 네명 중 둘은 건축가와 문학자가 되고 5녀인 보월과 9남인 보구가 부친의 예통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다. 보월은 북경경극원2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노생이 전문이다. 남자역 여자배우인 노생역은 충신, 효자, 의사 등의 역으로 악인은 결코 없다. 경극에서 특유한 눈화장은 하지 않고 반드시 턱수염을 단다. 노생역에는 좋은 풍격과 목청이 요구된다.

부친이 타계할 때까지 그 슬하에서 남화단의 전통적이고도 고도한 예통을 이어받은 부구는 불행하게도 문화혁명을 맞아 배우로서의 활약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강청은 남자가 여자역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남화단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한창 활동할 나이인 30~40대에 10년 동안이나 무대를 빼앗겼으나 무대 뒤에서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재주가 있어서 음향관계나 녹음과 같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문화혁명기간 중에는 매씨 일가가 살고 있는 북경시내의 사합원에 홍위병들이 밀어 닥쳐서 매난방을 비판하면서 그가 남긴 유물이나 기물을 훔쳐갔으며, 미망인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수난을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소 매난방을 높이 평가하였던 모택동 주석이나 주은래 총리가 항상 신경을 써 주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심한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강청 등 사인조가 실각된 후 전국에서 제일 먼저 전통극을 부활시켜 매파의 대표작인「패왕별희」에서 보구가 우희역을 연기했을 때에는 이르바 혁명모범극에 식상하고 있던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매난방과 함께, 전에 패왕역을 했던 노배우 유연영은 일부러 분장실까지 찾아와서 고전의 부활을 함께 기뻐해 주었다.

그러나 부구와 매파의 예술이 부활되는 데에는 문혁 후 2년이 소요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매파는 다시 번창해졌으며 상해에는 연구단체까지 생겼다. 부구가 출연을 위해 연습할 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추종자들이 모여 배우고 연마한다. 보구는 지방공연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으며 해외공연도 초청을 다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한다.

현재 매씨 일가가 살고있는 사합원은 1961년 매난방이 사거한 후 일족이 이끌고 가서 살게 된 곳인데, 부인도 1980년에 타계하였다. 매난방이 살던 구거는 그의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사진, 의상, 유물, 각종 기구 등 3만여 점이 정부의 주선으로 수납되었다. 일반에게 공개되어 경극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높여주고 있다.

넓은 중국 경극계에 남화단은 현재 매보구 한 사람만이 뚜렷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으니 과연 그의 국제적인 존귀성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북경경극원3단에는 보구 이외에도 경극계의 최고 배우인 이원춘이 있다. 경극의 3대요소인 창(唱), 염(念), 무(武) 중 활극(活劇)에서 그중 중요한 무생배우인 그는 손오공역이 특기다. 현재 무생배우들에게 손오공을 해내는 「위대한 스승」으로 꼽히고 있다.

매보구, 이원춘 이외에도 3단에는 이운추(李韻秋 1934~ ), 조혜영(趙慧榮, 1940~ ), 제건국(齊建國, 1958~ ), 해건화(解建華, 1958~ ), 조안민(趙安敏, 1948~ ), 왕수방(王樹芳, 1947~ ) 등 유명한 배우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다.